만사천원에 안전을 팝니다 [똑똑! 한국사회]


방혜린 | 군인권센터 국방감시팀장
어느 날 살고 있는 아파트에 벽보가 붙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입대위)에서 아파트 경비원을 18명에서 12명으로 줄이는 안을 제안하였으니, 이를 주민투표에 부치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아파트는 총 1045세대가 사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로, 18명인 지금도 동마다 경비원이 상주하지 못하고 여러 동을 담당하는 중이다. 입대위는 경비인력을 12명으로 줄이면 세대당 한달 평균 1만4천원의 관리비가 절감될 수 있다며, 표결 전 주민 대상 공청회를 열어 이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알렸다.
공청회 결과는 다음날 바로 게시됐다. 입대위는 비록 세대당 절감액만 본다면 절감 효과가 없어 보이지만, 연으로 따지면 1억7천만원이 절감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또 경비원 축소에 따른 세대별 택배 보관, 재활용, 음식물 처리, 청소와 소방, 주차 등 문제는 입주민의 협조와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온통 입대위 주장만 가득했다.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입대위에 경비원 감축안을 검토한 결과, 감축 시 운영안, 공청회에 참여한 세대 수와 나온 의견, 회의록 일체에 대하여 전 주민에게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공개는 됐으나, 그 내용 역시 이전과 다를 바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입대위는 인근 유사한 규모의 아파트 단지도 인력을 줄여서 운영 중이고, 신축 아파트는 보안시스템과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이용한 경비가 대세라며 인력이 줄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경비 소요를 고려해 설계한 신축 아파트가 아님에도 ‘다들 그렇게 하더라’는 황당한 해명도 어이가 없었지만, 가장 화가 치밀어 오른 부분은 경비원 축소 시 문제점과 운영 방안을 평가한 항목에 있었다. 평가 항목이 주차, 분리수거, 택배, 소방 화재탐지기의 오작동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 다섯가지였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원은 그냥 ‘경비아저씨’가 아니라, ‘경비업법’상 ‘시설경비업무’를 맡는 경비원에 해당한다. 우리 법은 시설경비업무를 경비를 필요로 하는 시설이나 장소에서의 도난, 화재, 그 밖의 혼잡 등으로 인한 위험 발생을 방지하는 업무로 정의한다. 즉, 경비원의 기본 업무는 화재나 사건 발생 시 경찰·소방이 출동하기 전 1차로 시설을 방호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경비업법상 경비원은 경비업에서 규정하고 있는 업무 외의 것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아파트 경비원이 택배나 주차, 분리수거, 미화 업무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공동주택관리법’상 예외 조항에 근거해서다. 이 예외 조항 역시 시설의 위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범위 내에서만 적용된다.
그러니 경비원을 줄이겠다는 것은 시설 내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이를 초기에 방호하고 처리하는 인력 자체를 줄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도 입대위는 주차와 분리수거, 청소만을 강조하며 ‘각 세대에서 협조하면 될 문제’라고 치부한다. 평소 경비원을 어떤 존재로 대한 것인지 빤히 보이는 태도다. 경비원은 화재탐지기가 오작동할 때 이를 기계실에 내려가 끄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아니다.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이를 신고하고, 주민을 안전히 대피시키고, 더 큰 재난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 역할이다. 경비원은 당신의 허드렛일을 대신해주는 집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한달 만사천원에 아파트의 안전을 팔 수 있다는 것, 경비노동자를 집단으로 해고하여 한 사람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짓밟고 안전을 포기하는 대가로 고작 한달 만사천원을 책정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누군가의 일터가, 또 누군가의 안전이, 결국 누군가의 생존이 만사천원에 거래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저렴한 사회인가.
결국 아파트에 대자보가 붙었다. 우리 집 말고도 누군가 이를 심각히 생각한 모양이다. 대자보의 작성자는 중요한 소임을 하는 사람을 비용으로만 계산해선 안 되고, 결국 경비 인력 감축의 최대 피해자는 주민이 되는 것이니 투표를 부결시켜달라 호소했다. 오전에 붙은 대자보는 오후 누군가에 의해 뜯겼다. 우리의 안전과 생존이 이다지도 싸게 거래되어도 괜찮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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