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찬구의 스포츠 르네상스] 15초로 짧아진 승부… 야구·농구·F1도 ‘순간의 서사’로 승부한다

심찬구 스포티즌 대표 2025. 5. 1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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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경기 시간을 짧은 영상으로 압축… 스포츠 서사 새로운 확장
韓 프로야구, 숏폼 세대 겨냥한 콘텐츠로 1000만 관중 확보
압축된 서사의 본질은 ‘진심’… 정치 숏폼도 자극 넘어 울림을

150㎞ 강속구가 꽂힌다. 삼진 아웃. 단순히 54개의 아웃 카운트 중 하나일 수 있지만, 만약 홈런왕 이승엽에게 늘 도망가던 피칭을 하던 투수가 처음으로 정면 승부에 도전하여 승리한 극복의 순간이라면? 혹은 그 강속구가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혼자서 4승째를 거둔 최동원의 역사적인 승부구였다면? 우리는 그 순간이 기억과 명예, 도전과 복수, 공감과 연대가 축적된 서사의 정점이라는 것을 안다.

1987년 5월, 최동원과 선동열이 연장 15회까지 맞붙은 ‘전설의 대결’은 여전히 회자된다. 4시간 56분의 경기 시간, 441개의 투구. 팬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경기의 흐름, 감정의 파고, 선수들의 사투를 공유했다. 불세출의 투수이자 선수 권익을 위해 싸우다 불이익을 감수했던 위대한 리더였던 최동원과 그를 존경하면서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치열하게 도전했던 선동열의 삶까지 투영시키자면, 그날의 장면들은 단지 하나의 야구 게임이 아니라 초기 한국 프로야구의 무형자본을 형성하는 서사의 출발이었다.

스포츠는 본래 서사의 예술이다. 승부는 한순간에 갈리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시간 속에는 감정과 기억, 관계와 맥락이 쌓여 있다. 팬들은 그 서사 속에서 감정을 나누고, 시간을 공유해 왔다.

그러나 미디어 구조와 콘텐츠의 제작, 유통, 소비 형태의 급속한 변화를 맞고 있는 지금 시대는 장구한 이야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TV 중계를 보며 전체 맥락을 따라가던 시청자는, 스마트폰으로 하이라이트만 소비하는 사용자가 됐다. 유튜브는 ‘스킵 가능한 구간’을 의식해 편집되고, 틱톡은 3초 안에 시선을 끌지 못하면 외면받는다. 하이라이트와 움짤, 숏폼과 리액션 클립의 조회 수가 시청률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래픽=이철원

변화 요구에 스포츠는 적응하고자 하고 있다. MLB는 2020년 이후 하이라이트 중심의 숏폼 콘텐츠 전략을 본격화했다. 오타니 쇼헤이의 표정, 벤치의 리액션, 홈런 직후의 몸짓 등 ‘순간’을 15초 안에 스토리텔링으로 변환한다. 자막과 음악이 덧붙고, 팬들은 그 짧은 영상 속에서 전후 맥락을 상상하며 댓글로 서사를 확장한다.

그 효과는 뚜렷했다. 2023년 MLB의 SNS 콘텐츠 참여율은 전년 대비 20% 이상 상승했고, 틱톡과 인스타그램 조회 수는 수십억 회를 돌파했다. 10~20대 팬층이 새롭게 유입됐고, 전체 경기를 보지는 않지만 팀과 선수에 몰입하는 ‘숏폼 세대’가 탄생했다.

이건 단지 물리적으로 영상의 길이를 짧게 만든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핵심은 압축의 기술이다. 예컨대, 오타니가 홈런을 친 직후 벤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2초짜리 장면에는, ‘지난 경기의 실패한 작전을 재도전한 끝에 성공했다’는 맥락이 깔려 있다. 팬들은 이를 유추하고, 댓글로 재해석하고, MLB는 다시 그 반응을 콘텐츠로 되묶는다. 이렇게 토막 났던 순간은 다시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

한국 프로야구도 변화를 겪었다. KBO는 2019~22년 동안 팬들이 만든 움짤과 클립을 저작권 침해로 규제하며 ‘움짤 단속기’라는 조롱을 받았고, 2013년 44%였던 20대 야구 관심도는 2022년 18%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2024년, 뉴미디어 파트너를 바꾸며 숏폼 콘텐츠 유통을 허용했다. 그 결과, 20대 여성의 소셜미디어 야구 콘텐츠 소비율은 2023년 68%에서 2024년 76.6%로 증가했고, 20대 전체 관심도는 49.7%까지 회복되었다. 숏폼 콘텐츠를 통한 관심의 회복은 2024년 KBO 1000만 관중 시대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픽=이철원

F1과 NBA도 정서와 맥락을 담아내기 위해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넷플릭스 다큐 ‘Drive to Survive’는 서킷을 반복해서 50바퀴 도는 지루한 형태의 단순 레이스 실황 중계가 아닌 드라이버와 레이싱 팀들의 갈등과 감정을 긴박한 호흡으로 클로즈업하며 F1의 미국 시장 확대를 이끌었다. NBA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하이라이트 스타’였던 자이언 윌리엄슨의 덩크 장면에 ‘Zion Cam’을 붙이며 순간의 상품화를 이끌었다. 생중계를 기다리며 전체 경기를 보는 팬은 줄었지만, NBA 소셜미디어 팔로어와 조회 수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변화한 미디어 환경과 콘텐츠 유통, 소비 형태에서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단순히 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짧더라도 전체를 유추하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설계가 필요하다. 순간 속에 맥락을 응축하고, 인물의 감정을 담아내고,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압축된 서사’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는 콘텐츠 제작자에게만 필요한 도전이 아니라 세상을 설득해야 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새로운 문법이다.

특히 정치는 서사가 가장 필요한 영역이다. 역사와 문화, 사회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이야기가 정치 현상과 인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정치는 미디어 변화의 흐름에 밀려 ‘순간의 유혹’에 붙잡혀 있다. 대선 국면에서 미디어의 짧아진 호흡에 쫓겨 자극적으로 선동하며 관심을 끌고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말초적인 표현들이 넘쳐난다. 후보의 철학과 시대에 대한 통찰을 담아낼 시공간을 마땅히 찾아내고 있지 못하다.

정치학자 알리나 무농은 “민주주의의 품질은 유권자가 서사를 따라가는 능력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이런 식이라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위기 상황이다.

그 흐름을 소비자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면, 공급자는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단편적인 장면 속에서도 본질을 보여줄 수 있고, 짧은 형식 안에 맥락과 서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콘텐츠의 형태는 짧아졌지만, 전달해야 할 진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짧아진 호흡에 얹어 전할 수 있는 자가 결국에는 선택받는다. ‘순간에 담아내는 서사의 기술’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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