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AI 횡포를 막을 칼은 어디에

실리콘밸리/오로라 특파원 2025. 5. 1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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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얼굴을 지브리풍으로 바꿔 X에 올린 프로필 사진 /X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는 1997년 당시 ‘할리우드의 왕’으로 군림하던 하비 와인스타인 앞으로 사무라이 검 한 자루를 보냈다. 함께 동봉된 쪽지에는 ‘No Cuts(편집하지 마시오)’라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와인스타인은 지브리의 영화 ‘모노노케 히메’의 미국 배급을 앞두고 러닝타임을 134분에서 90분 이내로 줄이려 했고, 이는 창작물에 손대지 말라는 날 선 경고였다. 그 결과 영화는 2년 뒤 무삭제판으로 미국에서 개봉됐고, 지브리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훗날 이 일화를 떠올리며 “내가 이겼다(勝ちました)”고 회고했다.

전설적인 ‘검 사건’ 이후 28년이 지난 2025년, 미야자키 감독은 아마 몇 번이고 사무라이 검을 들었다 놓았을 것이다. 챗GPT가 만들어낸 ‘지브리풍’ 이미지가 인터넷을 뒤덮는 광경을 본 84세 거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소 인공지능(AI)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만큼, 가능했다면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앞으로 서슬 퍼런 검과 함께 섬뜩한 경고를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풍’은 지식재산권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회색 지대에 놓여 있고, 오픈AI가 자사의 이미지를 무단 학습했다는 증거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할리우드의 자본 논리를 꺾었던 그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AI의 파도는 칼 한 자루로는 막기 어려운 싸움이라는 것을.

실리콘밸리의 AI 기업들은 더 이상 인류를 위한 기술을 안전하게 개발하겠다는 초심을 기억하지 않는다. AI의 실존적 위험을 우려하며 자발적으로 “우리를 규제해 달라”고 외쳤던 그들은, 이제 중국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이기기 위해서는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2년 전 미 상원 청문회에서 “AI 기술의 출시 여부를 허가하고 감독하는 정부 기관을 만들자”고 말했던 올트먼 CEO는 최근 “고급 AI를 정부 승인을 받아야만 출시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미국의 AI 선도력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며 정반대의 입장을 내놓았다.

말을 바꾸는 것은 고위 경영진만이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현장에 있는 기술 종사자들과 이야기해 봐도, AI가 특정 화풍을 모방하는 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결과만 좋다면 그 과정에서 일부 불이익이 생겨도 괜찮다는, 전형적인 실리콘밸리식 ‘효율적 이타주의’에 너도나도 편승하고 있다.

이 같은 도덕적 무감각 속에서, 텍스트·이미지·영상·음성 외에 얼마나 많은 인간 고유의 것이 자본과 기술의 논리에 제물처럼 바쳐지게 될까. 국내 대선 공약을 보더라도 ‘100조원 규모 AI 펀드’ ‘세계 3대 AI 대국’ 같은 자극적인 수사 외에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AI가 무엇을 빼앗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없이 내거는 공약들은, 결국 남들이 질주하니 우리도 일단 뛰어보자는 말밖에 안 된다. AI의 횡포를 끊어낼 칼 한 자루 없이 마냥 뛰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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