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이파리 다 떨어진 감나무 가지에 가깝죠
'시의 울림은 텅 빈 데서 생긴다. 시만 그렇겠는가. 사람도 그렇고 하다못해 깡통도 그렇다. 요즘 시는 왜 그리 꽉꽉 채워서 세상에 내놓는지 모르겠다. 욕심일 수도 있겠고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공부를 많이 하면 가벼워져야 할 텐데 왜 다들 무거워지는지…. 시 잘 쓰는 시인이 교수 되려고 공부 많이 하다가 평론가로 '전향'하는 경우가 왕왕 있잖아요. 한국 시의 손실이다' 그래서 "시인이여!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맙시다!"는 동길산 시인의 색깔, 지역 문화, 추구하는 시의 방향을 들어봤다.
동 시인은 글 쓰는 것 말고는 별로 하는 게 없다. 하루도 안 빠지고 만 보 이상 걷는다. 걷다가 메모하는 방식으로 쓰기도 한다. 길 걸으며 쓴 글은 책상에서 쓴 글이 못 따라온다고 한다.
■ 동길산 시인의 색깔은 어떤가? 고성에서 삶을 들려달라.
1992년부터, 30대 초부터 도시 생활을 접고 생면부지 경남 고성 대가면 산골에 들앉았습니다. '돈부자'는 단념한 대신 하루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 부자'를 택한 거죠. 시간은 남아돌고 하는 일은 별로 없으니,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서 마당을 내다보는 게 일과였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에 빗대서 '시인의 색깔'을 말해도 되겠네요. 시인의 색깔이 있다면 이파리 다 떨어진 감나무 가지에 가깝습니다. 잎도 그래요. 막 돋아나거나 한창 파릇한 잎이 아니라 마당에 굴러가는 낙엽의 색깔에 가깝죠.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저나 나나 다르지 않다는 이이일(二而一)의 감정일지도 모르죠. 고성 산골에 산 지 이제 30년 더 됩니다. 처음 10년은 한 달 내내 살았고 다음 10년은 한 달에 절반을, 지금 10년은 열흘 정도만 고성에서 지냅니다. 도시에서 현장 답사하며 쓰는 연재 원고가 많아지는 바람에 고성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진 거죠.
■ 1989년 등단했으니 35년. 어떤 시를 추구하나?
초중고 시절 독서량이 꽤 됐습니다. 여러 작가의 개성적인 문체를 접하면서 '나만의 문체'에 대한 욕구가 일찍부터 생겼죠. '누가 봐도 이건 동길산의 글이다' 그런 문체 얻으려고 고등학교 때부터 궁리했습니다. 문장을 늘리기도 하고 구부리기도 하며 문장 끝을 오므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며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시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남보다 잘 쓴 시가 아닌 남과 다른 시, 나만의 시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세에서 밀리고 유행에서 처지고 했습니다만 좀 밀리고 좀 처지면 어떻습니까. 나한테 부끄럽지 않고 나한테 당당하면 되니.
■ 동 시인은 유머와 여유가 있다. 당신의 낙천적 성향은 타고난 것인가?
서른 초반에 산골에 들앉으니 걱정해 주시는 분이 많았습니다. "이 나이부터 이러면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는 거였죠. 한 달에 글 한두 편 써서 10만 원 겨우 벌던 시절이었으니 누가 봐도 답답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봐도 그랬고요. 그냥 버텼습니다. 그 시절을 버티는 힘이 낙관이었습니다. 노인 연금 나오는 60까지만 버티면 된다! 나이 들면 다 똑같아진다! 적빈이니 안빈이니 낙빈이니 문자 써가면서 나를 다독이기도 했고요. 그런 게 켜켜이 쌓이면서 낙관 내지 낙천으로 이어졌지 싶습니다.
거창하게 '지역 문화' 내세워서 한 일은 아닙니다. 등대는 내가 답답해서, 비석은 남이 답답할 것 같아서 시작했습니다. 한국 어느 바다를 가봐도 등대가 다 있는데 자세히 보면 조금 조금씩 달라요. 왜 다른지 모르니 볼 때마다 답답했던 거죠. 소통이니 희망이니 그런 것 말고 등대 그들만의 언어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비석을 보고 있는데 젊은 아빠와 아이가 내 옆에 서는 거예요. 아들은 "아빠, 이게 무슨 글자예요?" 아빠는 "됐다. 가자!" 한지에 붓글씨 쓰기도 어려운데 딴딴한 돌덩이에 글자를 새긴 건 뭔가 곡절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곡절, 천년만년 남기고 싶은 그 마음을 젊은 아빠와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 고교 문예부장을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대학은 경제학과로 갔고 지금은 시인이다. 그 맥락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경제학과 가려고 한 건 아닙니다. 육사나 농대, 축산학과, 또는 서지학과나 한문학과를 가려고 했죠. 육사는 만성 중이염 때문에 못 갔고 농대나 축산학과는 집에서 반대해서 못 갔죠. 서지학과와 한문학과는 제가 살던 지역에 그 당시 없었고요. 국문학과는 가기 싫었습니다. 거기 가면 문학이 리포트의 대상, 숙제의 대상으로 전락하잖아요. 문학을 평생 즐기면서 돈이나 벌자는 마음에 상대 갔습니다. 상대 가서도 시를 계속 썼죠. 상대 교지 편집위원, 대학신문 기자도 했고요. 부산 MBC 사장 했던 이희길 기자, 부산시 기자협회장을 지낸 최헌, 울산매일신문 편집국장 했던 김흥두 기자, SBS 부·울·경 취재를 담당했던 송성준 기자, 세무사로 방향을 튼 양은진이 대학신문 동기였습니다. 경남대 국어교육과 김경복 교수는 한해 후배고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사보(私報)를 담당하면서 글 인연은 계속 이어졌죠. 그러다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돈하고는 이 나이 되도록 인연이 멉니다.
■ 작가 중에서 교류하며 마음을 나누는 분이 있는가? 어떤 면에서 깊이 교류하는가?
딱히 만나는 작가는 없습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비대면이 몸에 밴 것도 있고요. 술도 주로 혼자서 마십니다. 부산에서 고성 올 때 마산에 들러 성선경 시인을 보곤 하는데 그것도 일 년에 한두 번입니다. 고교 때 문예부 같이했던 친구들은 가끔 생각납니다. 부산대 국문학과 고현철 교수, 서울대 정치학과 강원택 교수, 동국대 신방과 김무곤 교수가 동기입니다.
■ 책을 꽤 낸 것으로 안다. 올해도 낼 계획이 있는지?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다.
책을 많이 냈다고 자랑할 건 아니지만 산골 시집, 산골 산문집 등등 아무튼 내기는 많이 냈습니다. 질이 안 되니 양으로 간 거죠. 올해는 옛날 지도와 관련한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스케일이 큰 책이다 보니 저나 출판사나 경제적 부담이 돼서 몇 년 동안 미루다가 얼마 전 공공기관 지원 사업으로 선정됐습니다. 옛날 지도에 나오는 지명과 지금 지명을 비교하면서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을 촉촉한 눈매로 되돌아봤습니다. 이 책이 마무리되면 산문보다 시에 매진했던 '시 초심(初心)'으로 돌아갈 작정입니다. 시적 감성이 바짝 마르기 전에 시 한 편 더 쓰려고 합니다.
동길산 시인은?
부산에서 나서 부산에서 자랐다. 부산의 길, 부산의 포구, 부산의 신발, 부산의 고개, 부산의 비석,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등등 부산 이야기를 많이 썼다. '부산의 등대', '부산의 비석' 등의 책이 있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거기' 등과 시·산문집 '어렴풋, 당신', 산문집 '우두커니' 등을 냈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
Copyright © 경남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