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시론] 초연결 사회에서 블라인드 선택이란- 김영선(전기연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정부 연구개발(R&D) 과제를 수행하노라면 기획·선정·평가 등의 과정에서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대상 과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배경이 있는 사람만 위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의 경험과 주위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때로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의 참여도 있다고 한다. 이는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평가위원 풀(pool, 인력자원)에서 무작위 선택 또는 다양성 보장을 강조한 나머지 발생한 역효과로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블라인드 선정이라 불리는 이 방법은 2017년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채용 과정에 전면 도입되었다. 지원자의 학력, 출신학교, 출신 지역, 나이, 성별, 외모 등의 정보를 배제하고, 오로지 직무능력 중심으로 평가해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2023년 기준, 350개 중앙공공기관과 410여 개 지방공기업에서 도입이 완료된 상태이다. 블라인드 채용 도입 이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 비율이 8.0%에서 5.3%로 감소했고, 여성과 고졸 출신의 입사율이 증가했다고 한다. 비수도권 대학 출신 비율도 상승했으며, 출신 대학의 수 역시 확대되어 사회적 약자와 지역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블라인드 채용의 일률적 적용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원자의 전공, 연구 성과, 경력 등 직무와 직접 연관된 정보를 제한적으로만 활용하게 하여, 특히 연구직이나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적합한 인재 선발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기관에서는 국적 확인이 어려워 외국인을 채용했다가 뒤늦게 문제가 된 사례도 발생했고 인성이나 태도 중심의 평가가 강화되면서 실질적인 경력 검증이 미흡해 팀장급 경력직 채용에서 부적합 인재가 선발되는 등 채용 실패 사례도 보고됐다. 일부 기관에서는 신입 직원의 업무성과가 낮고, 1년 내 퇴사율이 높아지는 현상도 있었는데 이는 단순 반복 업무에 고학력자를 배치하거나, 직무와 맞지 않는 인재가 선발되어 조직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지원자 정보를 제한하다 보니 추가 평가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증가했다는 사례도 있다.
1967년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최대 여섯 명의 중개자만 거치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라는 사회 네트워크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미국 네브래스카와 캔자스에 사는 16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이들이 보스턴에 거주하는 한 증권 중개인에게 편지를 전달하도록 했다. 단, 참여자들은 이 중개인을 직접 알지 못하므로 자신이 아는 사람 중 중개인과 더 가까울 것 같은 지인에게 편지를 전달해야 했다. 이 과정을 반복한 결과, 편지는 평균적으로 5~6단계(사람)를 거쳐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로써 밀그램은 사회적 연결망에서 누구든지 여섯 단계 내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오늘날의 초연결 사회에서는 SNS와 같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발달로 전 세계 수억 명이 평균 3~4단계만 거치면 서로 연결된다고 한다. 블라인드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2024년 4월 국가과학기술자문 회의가 발표한 ‘R&D다운 R&D’ 지원 추진전략에는 최고가 최고를 평가하도록 과제 신청자와 같은 기관에 재직하는 연구자도 동일 부서가 아닌 경우 평가가 가능하도록 제척(除斥)기준을 완화하고 전문 분야, 연구업적, 평가위원 경력 등의 체계적 분석을 위한 AI의 활용, 평가위원 마일리지 도입으로 참여자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을 포함하였다. 블라인드 선택으로 여전한 사회적 편견과 디지털 네트워크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지만, R&D와 같은 분야에서는 검증 한계와 역차별 사례도 있을 수 있다. 제도가 개선될 때까지 비전문가들에 의한 평가 과정에 많은 연구자가 노출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김영선(전기연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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