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명목을 찾아서] (9) 온계 이해 선생과 온혜리 밤나무

밤나무는 재배한 지 오래된 나무임에도 노거수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에 있는 것이 수령 600년으로 높이가 14m, 지름이 203cm가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자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이다.
밤나무가 오랜 유실수(有實樹)임은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에 잘 나타나 있다.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아버지 담내(談㮈, 삼국사기에는 담날 談捺)는 압량군(현, 경산시) 남쪽 불지촌 사람이었다. 만삭이 된 아내가 어느 골짜기를 지나가다가 밤나무 아래서 갑자기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때 같이 가던 담내가 옷을 나무에 걸고 산모를 돌보아 태어난 아이가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다.
나무를 사라수(紗羅樹)라 하고, 열매를 사라율(紗羅栗)이라 불렀다. 어느 절의 주지가 종자(從者)에게 하루 끼니로 밤 두 알을 주자 그 종자는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다. 관리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밤알 하나가 밥그릇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고 한다.

강원도 이어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右尹, 현 부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윤이 득세하자 이기의 심복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소윤과 대윤의 대립 문제를 지적한 구수담(具壽聃,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암 조광조의 조카사위이자 사림파)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에서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김안로가 인근에 살아 그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그마저 거절했다. 그러나 명종이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곤장 100대에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에 그쳤으나, 1550년(명종 5) 귀양 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장독(杖毒)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심문관 윤원형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화를 입었다고 한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 안동의 청계서원에 배향되었으나 뒤에 훼철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버스에서 내려 온계와 퇴계가 태어난 노송정으로 향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방문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태실을 둘러보고 새로 복원한 온계 종택으로 향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온계가 심은 밤나무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큰 나무가 들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 종택은 1520년(중종 15) 분가할 때 지었다고 하니 밤나무도 이때 심은 것으로 보인다. 온계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아우 퇴계가 어머니를 모시고 5년간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2대손 지암 이인화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자 1896년 관군이 방화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1년 복원했다.

그러나 보본(報本) 즉 조상의 은덕을 잊지 말라는 뜻이 더 강하다. 여느 나무와 달리 움이 터서 뿌리가 완전하게 내려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밤톨이 썩지 않고 자양분을 보충해 주기 때문이다.
약간 비릿한 꽃향기가 여성의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하여 성욕을 북돋운다고 한다. 그래서 '오월의 신부'라는 우리와 달리 영국에서는 "6월의 신부(June Bride)"라고 하는데 이때는 밤나무꽃이 개화하는 시기라 혼례를 치르면 성호르몬 분비가 왕성하여 임신이 잘 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구 문명을 중흥시킨 메디치가(Medici家)의 문장이 월계수이듯 최근 온계가(溫溪家)는 온계가 심은 밤나무를 문장(紋章)으로 택했다. 후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일 것이다.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이사장 / 전 대구시 녹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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