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총 토기, 도자 산호초…K공예 만국 공통 예술 되다

서정민 2025. 5. 1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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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크래프트 위크 2025’ 간 한국 공예
이달 12일부터 18일까지 ‘런던 크래프트 위크 2025(London Craft Week·이하 LCW)’가 열린다. 올해로 11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뛰어난 장인·작가들의 창조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됐다. 매년 엄선된 기획 전시·이벤트들을 통해 아름다운 작품들을 탄생시킨 창의적 재능을 조명하고, 작품들에 담긴 영감과 제작 과정 그리고 각기 다른 재료의 물성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의 미를 소개하기 위해 솔루나 아트 그룹의 공예 레이블 ‘솔루나 파인 크래프트’ 소속 작가 5명과 국가유산청이 참여했다.

천우선, ‘틈이 있는 기’ 시리즈, 금속. [사진 솔루나 아트 그룹]
LCW 기간에는 전 세계에서 날아온 기성·신진 작가, 디자이너, 브랜드, 갤러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가격이나 명성이 아닌, 공예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2015년 첫 개최 이후 규모와 인지도가 매년 성장하면서 지난해 31개국 200개 이상의 파트너가 참여했고 25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올해는 400개 이상의 전시와 1000여명의 작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자 디자이너인 샬럿 콜버트는 배터시 발전소의 역사적인 터빈 홀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마감한 실물 크기의 나무 ‘천사가 사는 곳’을 세워 주목받았다. 산업디자이너 브로디 닐은 산업현장에서 버려지는 베니어 자투리들을 조각 가구 소재로 활용한 ‘우드스트로크(Woodstrokes)’ 컬렉션을 선보여 폐목재의 잠재력과 예술적 표현의 새로운 장르를 제시했다.

유리 오브제엔 옻칠로 새로운 분위기
최기룡, ‘담다 21 레드’, 유리. [사진 솔루나 아트 그룹]
LCW 설립자인 가이 솔터는 크리스티 런던에서 열린 ‘시크릿 세라믹스(Secret Ceramics)’ 전을 주요 프로젝트로 소개했다. 히토미 호소노, 크리스타벨 맥그리비, 클라우디아 랭킨 등 유명·신진 도예가 100명으로부터 작품을 기증받아 동일하게 500파운드(약 100만원)에 판매하는 프로젝트다. 전시 명에 ‘시크릿(비밀스러운)’이 붙은 이유는 누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익명으로 판매가 진행되기 때문. 작가의 신원은 작품 구매 후 공개된다. 수익금은 소외 계층 청소년들을 위한 도예 워크숍 기금 마련에 쓰인다.

크리스티 런던 행사장에서 만난 솔터는 “공예를 통한 작고 단순한 움직임들이 어떻게 큰 변화를 만들어내고, 삶의 목적을 부여하며, 창의적인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길 바란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그는 이어서 “패션이나 디자인 영역의 일부로만 여겨졌던 공예의 가치가 점차 진지하게 성장하고 있다”면서도 “현대미술의 위상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덧붙였다. 솔터는 LCW를 시작하기 전부터 한국에 수차례 방문해 한국 공예가 좋은 협력자가 되기를 부탁한 바 있다. 이번에도 “LCW에서 한국의 중요도는 높다”며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계속 협업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감사를 표했다.

편예린, ‘덧없는 순간들을 위한 시 241018’, 도자. [사진 솔루나 아트 그룹]
LCW는 홈페이지를 통해 하이라이트 전시 10개를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솔루나 파인 크래프트’ 소속 작가 5인이 선보인 ‘재료의 풍경(Landscape of Materials)’전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도 “LCW는 국제적인 인재들을 많이 발굴할 수 있는 기회”라며 “‘재료의 풍경’전을 통해 한국의 장인 정신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켄싱턴의 더 레이버리 빌딩에서 펼쳐진 전시에선 이규홍(유리), 천우선(금속), 최기룡(유리), 정다혜(말총), 편예린(도자) 등 서로 다른 물성을 다루는 작가들의 주요 작품 50여 점이 소개됐다.

이규홍, ‘시간의 흔적 250401’, 유리. [사진 솔루나 아트 그룹]
전 세계 공예작가들의 최애 행사인 ‘로에베 재단 공예상’ 2022년 우승자인 정다혜 작가는 조선 시대 남성 모자인 갓의 소재 ‘말총’으로 고대 토기 등 매혹적이고 섬세한 3D 조형물을 제작한다. 13일에는 V&A(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서 시연행사도 있었는데 관람객의 호응이 뜨거웠다. 유럽에선 침대 충전재로만 쓰이던 부드러운 말총을 독특한 짜임으로 엮어 홀로 설 수 있는 기(器)를 만든다는 데 감탄한 이들은 “진짜 말꼬리 털만 이용하는 거 맞냐, 나일론을 섞은 것은 아니냐” 질문하기도 했다.

이규홍 작가는 옻칠로 다양한 색을 입혀 여러 번 가마에서 굽는 방법으로 보석처럼 투명하면서도 세월을 품은 낡은 골동품 같은 유리 오브제를 선보였다. 작가는 “빛을 머금고 있는 재료는 유리뿐”이라며 “그 물성을 이용해 아름답게 빛나지만 절대 손에 잡히지 않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정다혜 작가가 V&A뮤지엄에서 시연하는 모습. [사진 솔루나 아트 그룹]
얇은 금속 줄을 엮어 화병·그릇을 만드는 천우선 작가의 작품 시리즈에는 ‘틈이 있는 기(器)’라는 철학적 이름이 붙어 있다. 작가는 “기의 본질적인 기능은 ‘담다’인데 이를 위해선 ‘채움’과 ‘비움’의 순환이 필요하다”며 “금속 줄의 조합을 통해 틈을 만들고 채움과 반복이 동시에 일어나는 모호한 경계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게 작품 의도”라고 말했다.

에든버러 예술대학에서 공부하고 현재 동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최기룡 작가는 한국을 떠나 20년간 이방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유리공예로 표현했다. 원과 네모만으로 구성된 작품의 형태가 동양의 탑인 듯, 서양의 건축물인 듯 여러 이미지를 중첩하고 있는 이유다. 작가는 “유리작업을 하면서 거품으로 패인 흔적은 흔히 실패를 뜻하는데, 오히려 나는 그 흔적에 반짝이는 금가루를 채워 사람들이 가진 선입견에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했다. 도자처럼 보이는 불투명한 유리 질감도 인식의 전환을 위한 것이다.

유산진흥원 “전통공예 판로 확대 지원”
정다혜, ‘무빙 크랩’‘리빙 라인’‘진심의 시간’, 말총. [사진 솔루나 아트 그룹]
도자 작가 편예린의 제작 과정은 매우 독특하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수석 위에 흙을 입히는 캐스팅 방법으로 기본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이끼·꽃 등을 입혀 여러 번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가마 속 열기로 이끼·꽃이 타서 사라진 자리에는 이들을 잡고 있던 무수한 구멍만 남는데 이것이 눈 덮인 숲속 풍경인 듯, 바닷 속 산호초 풍경인 듯 오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LCW 창립자 가이 솔터가 ‘시크릿 세라믹’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진흥원·LCW]
한국 전통 공예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재료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물성이 가진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에 현대 조형미를 입힌 다섯 명의 작가는 한국적인 공예 언어를 세계인의 미감으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매듭 유소 클러치(김시재 매듭장 이수자). [사진 국가유산진흥원·LCW]
한국인 지인의 소개로 ‘재료의 풍경’ 전시를 찾은 네덜란드 현 국왕 빌럼 알렉산더르의 사촌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는 “다섯 명의 작가 각각이 한국 고유의 전통 기법에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더해, 혁신과 유산이 어우러진 친밀하면서도 시간성을 초월한 작품들을 선보인 자리”라며 “한국 공예의 예술성에 대해 감동적인 찬사를 보낸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더 레이버리 바로 옆 건물에선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이 K크래프트를 알리기 위해 준비한 ‘한국의 장신구(Objects of Beautification)’전이 열렸다.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와 현대 디자이너 간 협업을 지원하는 ‘전승공예품 디자인 협업 지원 및 인증제 운영 사업’을 통해 제작된, 일상 속 활용도가 높은 28종 82점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프로젝트다.

합죽선(김동식 선자장). [사진 국가유산진흥원·LCW]
주요 작품으로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로 남녀노소 모두 즐겨 사용했던 ‘장도’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우편물 개봉 칼로 제작한 ‘지칼’(제작-장도장 박종군 보유자, 자문-김주일 디자인주 대표), 실용적이면서 화려한 금박이 돋보이는 ‘가죽 금박 두루주머니’(제작-박수영 금박장 이수자, 자문-김주일 디자인주 대표), 전통 손누비로 완성한 ‘누비 실크 스카프’(제작-하은정 누비장 이수자, 자문-김현지 원이어퍼포먼스 대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전승공예품 인증제 사업’을 통해 국가인증을 받은 작품들이 함께 전시됐다. 대나무로 부채살을 만드는 전통 기법으로 만든 부채 ‘합죽선’(김동식 선자장 보유자, 김대성 선자장 이수자), 서안(책을 얹던 책상)에서 착안한 차반에 함의 기능을 더한 ‘서안 차반함’(김동규 소목장 이수자), 두루주머니(허리에 차는 작은 주머니) 형태에 전통 매듭 장식이 어우러진 ‘매듭 유소 클러치’(김시재 매듭장 이수자) 등이다.

귀장석 자개 백무늬 함(권영진 칠장 이수자). [사진 국가유산진흥원·LCW]
전시장에서 만난 우혜정 국가유산진흥원 공예기획팀장은 “한국 전승공예품의 가치와 쓰임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전통공예의 해외 진출과 판로 확대를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양에서도 칼과 부채가 익숙한 덕분인지 전시가 시작되고 ‘지칼’과 ‘합죽선’은 바로 완판 됐다. 현장에서 구매를 못한 이들은 QR코드를 안내받았는데, 국가유산진흥원이 운영하는 쇼핑몰로 전 세계 배송이 가능하다.

런던=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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