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하고 싶은 말
미처 쏟아내지 못한 슬픔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데
마음의 빗장 풀 단 한마디만…
릴리 킹 ‘북해’(‘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에 수록,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한 침대에서 한네는 오다에게 등을 돌리고 잤고, 다음날이면 해변으로 산책하러 가거나 등대까지 걸어가 보거나 공공 수영장에 가보자고 하는 오다의 모든 제안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다는 자신이 그 나이대 무엇을 재밌어했는지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큰 슬픔을 함께 겪었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윗방에서 호주인 부부의 세 아이가 내는 쿵쿵 소리도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귀중한 휴가가 하루하루 흐르고, 오다로서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한네에게 승마 교습을 시켜주는 수밖에.
딸이 말을 타러 가는 오후에 오다는 지금껏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볼 수도 있었다.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걸 보러 가고 유명한 정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오다는 그저 “책과 차를 옆에 두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기만 했다.” 멀리 내다보면 한네가 말을 타고 해변을 따라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얕은 물에서 말발굽이 반짝이는 것도. “휴가로부터의 휴가.” 오다는 생각했다. 어른들은 고통과 실패를 감추고 사춘기 아이들은 “보여주면 사라질 어떤 것처럼” 행복을 감춘다고. 그렇게 한네와 오다는 북해에서 자기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좋은 소설에서는 여러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동하는데 특히나 보조 인물의 역할이 그러하며 ‘북해’에서도 그 점이 돋보인다. 육아에 지친 호주 부부가 한네에게 세 시간, 베이비시터 일을 제안했다. 배를 타고 섬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불안해하는 오다의 눈에도 한네는 능숙하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간식을 먹인다. 그러나 부부는 약속한 시각에 오지 않았다. 왜 엄마아빠가 오지 않느냐고 겁에 질려 우는, 더는 통제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한네가 최면에 걸린 듯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네의 그 거짓말. 아마도 아빠가 죽었을 때 선생님이 한네를 불러 조심스럽게 한 말과 같을지도.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단편이 다루는 건 인물의 감정이며 그 일은 결말에서 꽃이 피듯 이루어진다. 처음 읽을 땐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한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휴가가 끝나기 이틀 전이었다. 마침내 펜션 현관으로 떠들썩하게 호주인 부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환호성을 외치면서 아이들이 뛰어나가고, 방에는 이제 한네와 오다만 남았다.
지난해 마음이 사나워져서 생략했던 카네이션을 식탁에 올려두면서 내 어머니에게도 할 말이 많다고, 서로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고 여겨왔다. 모녀를 다룬 좋은 단편들이 그렇듯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든다. 그냥 한마디면 충분한지도 모르겠다고. “엄마.” 엄마라는 그 기도 같은 부름이면.
조경란 소설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비공 출신·국가대표 꿈꾸던 소년이 톱배우로…원빈·송중기의 반전 과거
- 연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하정우·차인표·유준상 ‘제2의 직업’
- “언니 변호사, 동생 의사” 로제·송중기 무서운 ‘집안 내력’ 보니
- “포르쉐 팔고 모닝 탄다… 훨씬 편해”…은혁·신혜선·경수진이 경차 타는 이유
- 똑같이 먹어도 나만 살찌는 건 ‘첫 숟가락’ 탓
- “비겁했던 밥값이 30억 됐다”…유재석·임영웅의 ‘진짜 돈값’
- “월세만 3700만원” 박민영, 40억 투자해 ‘110억 빌딩’ 만든 무서운 수완
- “하루 한 캔이 췌장 망가뜨린다”…성인 10명 중 4명 ‘전당뇨’ 부른 ‘마시는 당’
- “22도면 괜찮겠지?”... 1시간 만에 ‘나노 플라스틱’ 폭탄 된 생수
- “8억 빚 파산한 중학생”…박보검, ‘몸값 수백억’에도 ‘이발 가위’ 쥔 진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