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무지개 끝까지, 달려라 무니 ‘플로리다 프로젝트’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30번째 레터는 7년 만에 4K 버전으로 재개봉한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입니다. 성 노동자를 다룬 영화 ‘아노라’로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션 베이커 감독의 대표작이죠. 개인적으로는 ‘아노라’보다 훨씬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서, 아직 못 보신 분이 계시면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1960년대 디즈니 테마파크를 만들기 위해 디즈니가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일대의 땅을 사들이며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기념품 가게, 레스토랑,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모텔들이 들어섰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이곳은 슬럼가로 전락했습니다. 집을 잃고 오갈 데 없는 빈곤층은 저렴한 모텔을 전전하게 됐고요.
영화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 월드 코앞, 싸구려 모텔촌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베이커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쓴 크리스 버고시는 이 지역 모텔 주차장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보랏빛 모텔 ‘매직 캐슬’에 사는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 무니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왜 저렇게 걷지 않고 뛰어다닐까, 어떻게 저렇게 작은 체구로 지치지도 않고 뛸까 항상 궁금했는데요. 우리의 주인공 무니도 엉덩이에 부스터라도 달린 것처럼 영화 내내 아주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모텔에 못 보던 자동차가 들어오면 유리창에 침을 뱉어주려고 뛰고, 전원 차단기를 내려 모텔을 정전시키고는 쫓아오는 매니저를 피하기 위해 뛰고, 이웃 모텔 ‘퓨처랜드’에 사는 친구 젠시를 만나러 가기 위해 뛰고.... 어찌나 씩씩하고 기운이 넘치는지 관객은 무니를 따라 홀린 듯이 동네 구석구석을 탐험하게 됩니다.
(※아래부터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 영화엔 악역이 딱히 없습니다. 무니의 엄마 핼리는 아이 앞에서도 욕설을 서슴지 않고, 틈만 나면 담배와 마약을 찾지만 누구보다 무니를 사랑합니다. 성매매를 해서라도 생활비를 벌고 아이를 책임지려 하는 핼리를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엄격한 모텔 매니저 바비도 실은 위험한 환경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쓰는 수호자 같은 존재입니다. 양육 환경을 점검하러 오는 아동국 직원까지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게 상황은 계속 악화됩니다.
세차게 비가 온 뒤, 모텔 위로 뜬 무지개를 바라보는 무니와 젠시의 뒷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무지개 끝에는 황금이 있대”라는 무니의 말에 젠시는 “황금 옆에 난쟁이 요정이 있어서 못 가져 가게 한대”라고 걱정합니다. 무니는 역시나 씩씩하게 “때려눕혀버리자”고 하죠. (놀랍게도 이 무지개 장면은 CG가 아니라 실제 무지개입니다. 다른 장면을 촬영하던 중 마법처럼 뜬 무지개를 포착한 덕분에 명장면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노는 장면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무니와 젠시가 그토록 멀게 보였던 디즈니 월드로 달려가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그전까지 3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것과 달리, 마지막 장면만큼은 디즈니 월드의 촬영 허가를 받지 않고 감독이 아이폰으로 몰래 찍었는데요. 영화의 톤이 완전히 바뀌는 엔딩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면서도 뭉클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동안 동화처럼 보였던 알록달록한 동네가 얼마나 쇠락한 폐허인지 적나라하게 노출되죠. 아이들은 모텔촌과 디즈니 월드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마법의 성을 향해 달려갑니다.
7년이 지나고 영화를 다시 보니 무니는 어떻게 자랐을까,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현실적으로 돈 한 푼 없는 아이들이 디즈니랜드에 들어갈 순 없었을 테니 영화의 엔딩은 아이들의 상상이라고 봐야겠죠. 그래도 저는 무니가 무지개 끝 황금을 찾아서 떠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 무니라면 난쟁이 요정 따위는 가볍게 때려눕혀버릴 수 있을 겁니다. 이 먹먹하지만 아름다운 엔딩은 현실의 모든 무니들이 세상 끝까지 힘차게 달려가길 바라는 응원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저는 다음 레터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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