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토론의 승자는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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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은 며칠 아팠다.
곧 대선 티브이 토론이 시작되고 그에 관한 논평과 인용이 소셜미디어를 포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방금 끝난 티브이 토론에 대해 논평할 때 우리는 그런 게 없는 척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티브이 토론을 가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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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리처드 닉슨은 며칠 아팠다.
그는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누구 아이디어였는지, 밝은색 양복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튜디오 배경도 밝은색이었기 때문에 흑백 티브이에서 그는 존재가 희미해 보였다. 상대인 존 에프 케네디가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와서 선명한 인상을 남긴 것과 대조적이었다. 케네디는 젊고 호감 가는 외모에 목소리도 좋았다. 그가 실제 토론에서 닉슨을 압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토론을 라디오 중계로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더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티브이 시청자들은 아는 건 많으나 방어적이었던 닉슨보다는 자신감과 여유를 보여준 케네디에게 더 점수를 주었다. 두달 뒤 치러진 1960년 미국 대선에서 케네디는 승리했다. 닉슨과 0.17%포인트 차였다.
케네디-닉슨 토론은 역사상 최초의 대선 티브이 토론이다. 언어보다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가 왔음을 알려준 전환점이라고 한다. 하도 언급되니 이제는 진부한 느낌도 든다. 이 신화를 반박하는 의견들도 있다. 토론은 승패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토론 전 이미 케네디가 우세했다), 학자들이 이 토론에 그토록 중요성을 부여해 온 이유는 그들 전공(미디어, 홍보, 이미지)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등등.
정말 이미지가 말보다 중요하냐고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이런 토론을 떠올려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표정과 태도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소론과 보유’에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한다. “이쪽 보고 말하게. 내가 자네를 잘 ‘볼’ 수 있도록.” 말의 내용보다 거동에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은 동서양 공통인 모양이다. 아무튼 토론을 너무 소크라테스식으로 본 탓인지는 모르지만 다음날 요약 기사나 논평을 보면 놀라곤 한다. “갑이 을을 논리로 압도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갑의 재수없음에 질리고 을의 침착함에 끌렸던 경우가 꽤 있다. 과거 정치인들의 이름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갑은 이미지, 즉 무언의 메시지라는 영역에서 패한 것이다.
대선이 3년 만에 다시 치러진다. 곧 대선 티브이 토론이 시작되고 그에 관한 논평과 인용이 소셜미디어를 포화시킬 것이다. 나는 후보들이 카메라 앞에서 필담을 주고받는 게 아닌 이상, 언론에서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들의 표정과 말투를 스포츠 중계하듯 짚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티브이 토론을 오직 언어로 이뤄진 것처럼 다루는 관행도 이해는 된다. 대선 티브이 토론은 뭘까? 후보들이 정견을 겨루면 이를 유권자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공표하는, 민주국가의 고도로 상징적인 의례이다. 그게 선거의 정확한 현실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그때 말의 내용이 아닌 말투나 태도를 지적하는 건 의례의 암묵적 약속을 위반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미지가 정치를 지배한다고 말해진 지 60년이 지났다. 하지만 방금 끝난 티브이 토론에 대해 논평할 때 우리는 그런 게 없는 척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지가 선거에서 무시되는 일은 없다. 선거 운동 자체가 철저하게 연출된 이미지 전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티브이 토론을 가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때만은 후보측이 완벽히 대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당황해서 얼굴이 굳는다든지, 공격성이 과도하게 노출되는 순간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그런 허점을 1초도 노출하지 않는 후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게 연기일지라도, 그리 나빠 보일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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