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하지만 깊은 멋, 봄날 봉화와 영주 나들이 [투얼로지]
봉화·영주|김재범 기자 2025. 5. 14. 17:39

‘수더분하다’는 표현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성질이 까다롭지 아니하여 순하고 무던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개는 사람의 성품에 쓰는 표현이지만, 여행지 중에도 이런 수더분한 매력을 가진 곳들이 있다. 시끌벅적한 전국구급 유명세의 공간이거나, 한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비주얼은 아니지만 언제 가도 늘 마음 부담이 없는 편하고 은근한 매력을 가진 그런 지역이다. 이번에 5월 봄비를 맞으며 1년 만에 찾은 경북 봉화와 영주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수더분한 멋’을 지닌 고장이다. 지역 곳곳에 꽤 볼만한 관광명소를 여럿 지니고 있지만, 고장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들뜨거나 요란하지 않다. 영남 선비 문화의 꼿꼿한 기개가 여전함을 느낄 수 있고, 오랜만에 놀러간 고향이나 시골 어르신의 집같은 정겨움이 있다. 정신 사나운 ‘오버 투어리즘’의 관광지 분위기에 질렸다면 ‘여행 디톡스’로 가볼만한 곳이다.

●[봉화]청량감 가득, 천연 탄산의 약수 봉화는 태백산맥이 가로지르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고장이다. 한때는 인구가 12만 명을 웃돌았지만 지금은 채 3만 명이 안된다고 한다. 지역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이 아닌 꽤 험준한 산골과 계곡이어서 예전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등짐을 지고 인근 박달령 등 높은 산을 넘나들던 보부상들에게 생필품 유통의 상당 부분을 의지했다.

물야면 오전리의 오전약수관광지는 이처럼 봉화 사람들의 생활경제를 책임졌던 보부상이 발견한 약수다. 조선 성종 때 처음 알려졌는데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유학자 주세붕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만 하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명성이 높다. 1985년 관광지로 지정되어 지금은 매년 30여만 명이 찾는 봉화의 인기 명소이다. 지자체에서 보부상 조형물도 세우고 이런저런 공원화 작업을 통해 가꾸었지만, 다른 곳에 비해서는 덜 요란스럽다. 그런 소탈한 모습이 오히려 계곡 등 약수터 주변 자연 경관을 거스르지 않아 숲길을 걷는 재미가 있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오전약수는 가볍게 톡 쏘는 탄산 덕분에 청량감이 있다. 물맛은 아이들이 흔히 ‘쇠맛’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도 다른 지역의 비슷한 약수와 달리 탄산이 강하지 않아 계곡을 거슬러 산책한 뒤 한 모금 마시기 좋다. 오전약수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외씨버선길’이라는 표지가 눈에 띤다. 청송, 영양, 봉화, 영월 등 산세가 깊은 인근 네 지역을 연결한 도보여행길이다. 오전약수관광지는 외씨버선길 중 제 10길(약수탕길) 코스의 한 곳이다. ‘외씨버선길’이란 이름은 길을 구성하는 네 고장을 이으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처럼 보인다고 붙은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경북 울진에서 서해 태안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849㎞의 동서트레일 중 47구간 거점마을이기도 하다. 동서트레일은 국내 최초로 숲길로 이루어진 트레일길이다. 이중 47구간은 총 14.86km로 난이도는 보통 수준이다. 봉화 여행 일정을 여유있게 짰다면 한번 도전해 볼만 하다.

다른 고장의 약수 관광지가 그렇듯이 오전약수도 인근에 닭이나 오리백숙 음식점이 많다. 가볍게 돌아보고 백숙집을 찾아도 되지만, 조금 색다른 것을 먹고 싶다면 화덕피자 ‘봉화객주 카페’도 있다. 건물이 조금 특이한데 관리사무소를 리모델링했다. 가게 간판에서 ‘외씨버선길’의 픽토그램을 볼 수 있다.

●[봉화]미슐랭도 인정한 풍광 맛길 35번 국도는 봉화 청량산과 안동 도산서원을 잇는 길이다. 경북 내륙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지방 도로였지만 주변 경관이 빼어나 드라이브 명소로 알음알음 입소문을 탔다. 결정적으로 여행정보를 소개하는 ‘미슐랭 그린 가이드’에서 이 길에 1스타를 부여하면서 유명해졌다. 낙동강을 향해 흐르는 운곡천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훌쩍 산속으로 방향이 바뀌는데, 고개를 거진 올라갈 때쯤 범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봉화여행의 추억사진을 찍고 싶다면 이곳이 1티어 명소다.

조선시대 조상 묘소에 성묘왔던 한 선비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전망대는 깍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작은 전망 데크를 조성했고 옆 바위에 전설을 상징하는 호랑이 두 마리의 조형물이 있다.

전망 데크의 까마득한 아래로 황우산을 그림처럼 감아 흐르는 낙동강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물길이 매호유원지를 지나 멀리 운곡천과 만나는 낙동강시발점 테마공원까지 이어지는데, 모두 전망대에서 조망할 수 있다.

범바위전망대에서 내려가 다시 물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전망대에서 봤던 낙동강시발점 테마공원이 나온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지류가 이곳에서 운곡천과 만나 본류를 이룬다. 공원은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머리에 있는데, 강 건너까지 이어진 명호 이나리출렁다리가 있다.

길을 계속 쭉 달리다 보면 봉화의 또 다른 명소 예던길과 만난다. 퇴계 이황이 10대 시절 숙부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집과 청량산을 오갔던 길이다. 낙동강시발점테마공원에서 청량산 청량교까지 구간으로 중간 지점에 선유교가 있다.

●[봉화]선비 문화의 자취를 이곳에 봉화에는 유난히 누각과 정자가 많다. 그 수가 무려 103좌라고 한다. 봉화가 우리나라 누정(누각과 정자) 문화의 중심지라고 자부하는 이유기이기도 하다. 2022년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청암정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는 등 전국에서 누정이 가장 많고 또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런 지역 특징을 살려 2020년 봉성면에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국내 유일 누각과 정자를 테마로 한 전시관이다.

이름만 들으면 아담한 규모의 전통문화 전시관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누정전시관과 야외정원, 숙박시설 등으로 이루어진 꽤 큰 시설이다. 전시관에서는 누정의 개념과 특징 부터 건축 구조 및 원리, 누정산수화와 문학 등 다양한 예술작품과 관련 일화까지 누정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하고 있다.

압권은 야외정원인데 봉화의 청암정 석천정자를 비롯한 전국의 대표 정자를 그대로 재현해 넓은 부지에 배치했다. 그외 80명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도 있다.
●[영주]봄비 맞으며 거닐은 호숫가와 고택들 봉화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인 영주에는 압도적 풍광을 자랑하는 부석사나 영남 선비 문화의 정수인 소수서원 같은 명소가 있다. 하지만 5월 정취를 돋구는 봄비 맞으며 찾은 이번 여행길는 가급적 친숙한 ‘전국구’ 관광지가 아닌 곳을 최대한 찾아다녔다.

그 첫 방문지가 용마루 공원이다. 낙동강 수질개선과 용수 확보를 위해 지은 영주댐 덕분에 생긴 인공호수, 영주호 주변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영주호 속의 2개의 섬을 다리로 연결해 산책할 수 있는 코스다. 산책로와 정자, 옛 기차역인 평은역, 기념비 광장 등이 있다. 길이 까다롭지 않고 호수를 바라보는 탁 트인 경치가 시원해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 좋다.

조금 본격적으로 트래킹을 하고 싶다면 용마루1공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고, 가볍게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용마루2공원만 가면 된다. 용마루2공원은 용미교와 용두교 2개로 이어져 있다. 용미교는 아치교 형태로 길이 약 75m이며, 중간에 유리바닥 구간이 있다. 용두교는 길이 150m의 현수교 형태로 출렁다리다. 영주댐 건설로 폐역이 된 평은역은 영주호 섬 안에 복원했다.

순흥의 선비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인 안향 선생의 고향에 조성한 선비문화 테마파크다. 한국 유교 문화 발상지인 소수서원에 인접해 있다. 영주 선비들이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했다. 테마파크는 선비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 입신양명, 거무구안, 우도불우빈 등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김상진 가옥, 해우당 고택, 인동장씨종택, 두암고택, 김문기가, 만죽재 등 유명 고택을 실제 모습 그대로 정성스럽게 재현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 마을에서 하룻밤 머무르며 옛 선비들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한옥 숙박체험과 전통문화체험을 운영한다.

숙박체험은 여러 고택에서 실시하고 전통문화체험은 강학당에서 진행한다. 한지공예, 염색, 규방 체험 등이 있다.
●[영주]아이와 함께 가면 좋은 생태교육 현장 순흥면에는 국립공원공단이 운영하는 여우생태관찰원이 있다. 토종여우는 우리나라의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이다. 여우는 개과 동물 중에는 중간 크기에 속하며 잡식성으로 수명은 약 3~6년이다.

동화나 전설 속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호랑이나 늑대는 물론이고 담비나 오소리, 삵 같은 다른 포식자에 비해서도 약한 동물이다. 과거 한반도 전역에 분포했으나 1960년대 시행되었던 ‘쥐잡기 운동’ 등으로 개체 수가 급감해 이제는 야생 서식 상태로는 절명 위기를 맞고 있다.

여우생태관찰원은 이처럼 위기를 맞은 토종여우 복원을 위해 2016년 11월 문을 열었다. 국립공원공단 종복원기술원에서 운영을 맡아 주로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든 여우를 보호하고 회복시켜 자연으로 돌려내는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여우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며 소백산에서 시작해 백두대간을 따라 설악산과 지리산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여우복원사업은 원종 확보 및 증식, 야생적응훈련, 방사 등의 과정을 통해 생태계 건강성 및 지속성을 확보하고, 생물종다양성 증진과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의 기틀 및 관리기반 마련을 목표로 한다. 여우생태관찰원은 관리동과 홍보동으로 이루어졌고, 하루 3회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전문해설사와 함께 생태학습장을 탐방할 수 있다. 전국에서 구조해 야생에 방사해 키우고 있는 여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농작물이나 가축 보호를 위해 사람이 놓은 덫이나 올무로 인해 불구인 여우들이다. 환경 보존과 생태계 유지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공간이다. 특히 아이와 함께 여행한다면 생태교육 차원에서 꼭 가보는 것이 좋다.
●[영주]여전히 고즈넉한 정취의 나무다리 강물이 산에 막혀 돌아 흐르는 것을 물돌이동이라고 하는데, 낙동강 유역에 꽤 많이 있다. ‘물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의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감아 도는 물돌이동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이번 영주여행에서 이곳만 지난해에 이어 다시 방문했다. 햇살 화창했던 지난해 여름날 찾았던 느낌과 달리 내리는 봄날 무섬마을의 모습은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이후 선성 김씨가 들어오면서 현재는 두 집안의 집성촌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와 크기의 전통 가옥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경북 북부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많다. 반남 박씨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를 비롯해 9채가 경북문화재자료와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된다.

마을 밖으로는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너른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강 위로는 다리가 놓여있어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백사장과 물 위에 놓은 좁은 나무 다리가 대표 명물로 영주 여행의 인증샷은 꼭 이곳에서 찍는다.
봉화·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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