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경력 박정자도 무대서 첫 대본 받는다... "삶처럼 기회는 단 한 번"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사면의 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 위에는 소형 사다리와 작은 원형 테이블이 있다. 그 테이블 위에 두 개의 투명 물컵이 놓여있다. 물컵에는 같은 양의 물이 따라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 밀봉된 봉투에 대본이 있다. 프로듀서가 배우를 소개하면 배우가 등장해 관객에게 말을 건다. 배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밀봉된 대본을 펼친다. 이렇게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이 시작된다.
무대서 처음 대본 보고 연기
2010년 발표된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의 작품으로 2011년과 2012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소개되어 베스트 뉴 퍼포먼스로 선정되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 20개가 넘는 언어로 소개되었고,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독특한 형식에 있다. 배우는 아무런 정보 없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대본을 받아들게 된다. 연습도 없고, 연출도 없다. 처음 받아본 대본을 즉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공식 공연 시간은 70분이지만 배우가 진행하는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필자가 본 공연은 90분이었지만 배우에 따라 120분까지 늘어나기도 하고 더 빨리 마무리되기도 한다. 정해진 대본만 있을 뿐 어떻게 연극을 풀어나갈지는 철저히 배우에게 달려 있다. 배우는 관객들과 함께 처음 받아본 대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극을 이끌어나간다.

이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단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약간의 정보를 준다면 서사가 뚜렷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느슨하지만 콘셉트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선택을 향해 사건이 쌓여가는 비교적 견고한 플롯을 지녔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극 속 인물이면서 배우의 개성이나 말투, 성격이 반영된다. 동시에 작가의 사상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대본이 설계되었다. 배우는 작가이면서 작품 속 인물이 되고 또 배우 자신으로 위치하며 극을 이끌어간다. 배우는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극을 진행시킨다. 극 초반 이것은 공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실험이라는 대사가 있다.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관객들과 함께하는 연극성에 대한 실험이다.
연극은 비효율적인 장르이다.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공연 시간, 장소, 출연 스케줄까지 점검해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세상은 점점 편해지지만 연극은 2,500여 년 전 탄생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의 수고로움을 요구한다. 그런 수고로움을 지불해야 관객은 숨 쉬고 움직이는 배우를 눈앞에서 만날 수 있다.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만나면서 완성되고 동시에 소멸되는 순간의 예술이다. 영화나 그림, 문학처럼 박제될 수 없는 정해진 시간에 그곳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 예술이다. 매일 동일한 대본으로 동일한 배우가 공연한다고 해도 매 공연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의 형식과 내용은 연극의 본질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연극의 특성을 대본으로 담아낸 메타연극(연극에 대한 연극)적 속성을 지녔다.
단 한 번의 무대, 단 한 번의 삶
변화와 미완성 그것은 연극의 숙명이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완벽한 연극이란 있을 수 없다. 영상이나 음악이 추가 촬영이나 보정을 통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지만, 연극은 배우가 무대 위에 서면 더 이상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 그가 선택하고 행동한 결과물이 그날의 연극으로 완성된다.
종종 삶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하는데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삶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혼자가 아닌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완성해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단 한 번이듯, 이 연극에서도 모든 배우의 무대 위에서 연기할 기회가 단 한 번만 주어진다. 박정자, 박상원, 남명렬, 하도권, 이엘, 한지은, 김도연 등 33명의 배우가 연극을 하루씩 책임진다. 아무리 유명하고 관객의 박수를 많이 받아도 한번 이 무대에 오르면 다시 이 무대에 설 수 없다. 우리의 삶처럼 각 배우에게 앙코르가 없는 셈이다.
우리 인생을 닮은 매우 특별한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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