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 30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

양영수 2025. 5. 1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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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스마트소설] 20. 벚꽃마을의 경사
'2014년 4.3평화문학상 수상자' 제주 원로 소설가 양영수 씨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분량은 짧지만 반전과 여운을 남기는 꽁트 소설을 격주로 [제주의소리]에 연재한다. 일명 '양영수의 스마트소설'이다. 모바일 인프라가 널리 보급된 시기에, 스마트폰으로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꽁트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취지다. [편집자 주]  
글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한 AI 이미지. ⓒ제주의소리

해마다 벚꽃마을 수성리에서 열리는 벚꽃잔치는 제주도만이 아니라 육지 사람들에게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하다. 매년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고 하지만, 이 마을처럼 성황을 이루는 벚꽃행사는 많지 못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벚꽃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하여 공을 많이 들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벚꽃 만개 기간이 짧다는 약점을 감안하여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른 여러 종류의 벚나무를 계획적으로 들여왔다는 설명이다. 축제 기간 중에 열리는 행사 또한 푸짐하다. 제주도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가요 경연대회에서는 미리 예선을 통과한 가수 지망생들이 출연하는데, 이 때는 제주 출신이나 제주도와 관련이 있는 유명 가수들을 초청한다고 했다. 

축제 기간 중에는 푸짐한 먹거리 장터가 열려서 더욱 성황을 이루는데, 이건 인근 민속시장 요식업자들이 대거 참여하도록 유도한 결과라고 한다.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행사로는 제주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것이 있다.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 제주도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이렇게 많은가 놀랄 정도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태국,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전통음악이나 무용을 보여주는 프로를 마련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이 마을 청년회에서는 1년 간 부지런히 민간외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벚꽃마을 수성리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업소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고급스럽다고 하는 '추억만들기 펜션'에서는 서울에서 온 한 남자가 아침 느직이 잘 가꾸어진 펜션 정원에 나와 있다. 아직 철이 일러서 꽃밭에 화초들은 꽃봉오리만 키우고 있고 목련나무에서만 만개 직전의 하얀 꽃이 시선을 끌고 있다. 바로 그 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정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혼자 탑승하고 온 여자가 남자를 향하여 한 마디 한다. 그가 펜션 손님인 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여기 주인 할아버지가 저의 삼촌이에요. 지금 안에 계신가요?"

"오늘 아침에 어디 나가신다고 외출 중인데 용건이 있으면 전화하라고만 하고 나가셨어요." 

여자는 차를 세워두고 지체 없이 정문 밖으로 나갔는데, 남자는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눈앞에 세워진 승용차를 또 유심히 둘러본다. 자동차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차창 속 내부까지도 찬찬히 들여다본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2층에 있는 자기 숙소로 올라간다.

남자는 저녁 해가 서쪽하늘에 기울어질 무렵까지도 펜션 밖으로 나가는 기색이 없다. 다만 다시 한 번 아래층으로 내려와서는 여자가 세워둔 고급 승용차를 또다시 둘러본다. 주차하고 나갔던 여자가 해거름에 돌아왔을 때에는 지체 없이 내려와서 말을 먼저 붙였다. 

"실례지만, 혹시 장영주 씨 아니신지."

"그렇습니다만은, 어떻게 저를…."

"장영주가 맞구나, 맞아. 나 김달호요, 김달호…. 코 밑 수염을 길렀다고 김달호를 몰라보다니." 

"수염을 그렇게 꺼멓게 기르니 몰라볼 수밖에."

여자는 지체 없이 자동차 밖으로 나와서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남자는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하여간, 반갑소. 우리가 이 마을에 같이 살았던 것이 20대 중반까지였으니까 대략 30년 만의 만남이오. 고향마을에서 벚꽃축제 한다는 소식을 서울에서 듣고는 일부러 내려왔소. 우리 이러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여기 와서 3일 째인데, 제주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정말 놀라버렸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는 2층에 있는 남자의 방에 들어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어느 틈엔지 두 사람의 말투는 반말로 바뀌어 있다. 

"삼촌 댁에 자동차 맡기고 나가다니, 그럼 이 마을에 살지는 않는구나."

"결혼 하면서 제주시로 옮겨갔지. 해마다 수성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을 벚꽃축제 기간 일요일에 갖기로 했어. 오후 다섯 시 동창회 모임까지는 자유시간이고, 동창회 모임이 끝난 다음에는 술 마실 사람들만 같이 모여서 식사하기로 했어. 오늘 모임은 정기총회가 아닌데도 모두 열두 명이 나왔는데 보통 그 정도는 모여." 

"장 선생은 아침 시간부터 지금까지 뭐를 했는고." 

"아, 난 제주도에 와 있는 외국인들의 가무공연을 봤지. 제주도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나 동남아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마을 벚꽃축제 공연을 위해 일부러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데. 제주도가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유명하다는 거지. 근데 김달호 코밑 수염은 어찌 된 일이여.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건가." 

"여기 고향 사람들이 나를 몰라보도록 변장한 거야. 수염까지 기르고 변장했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장 선생을 만나다니. 장 선생 삼촌댁에 내가 머물게 된 것도 그렇고, 역시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운명적인 뭐가 있어. 그 동안에도 교직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나?" 

"그렇지 뭐. 한 번 택한 길 바꾸기가 쉬운가. 나보다도 김달호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그 얘길 하자니까 가슴이 막 떨리네. 아침에 장 선생을 내보내고 나서 하루 종일 고민했다는 거야. 나의 정체를 밝히느냐 마느냐, 결정을 못하다가 결국엔 용감하게 밝히기로 한 거지. 애초에 제주도 들어올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심산이었지."

"그 심정 참 딱해 보이네."

"장 선생은 나를 만나면서도 표정이 멀쩡하네.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인하다는 건가, 너그럽다는 건가. 난 과거에 장 선생을 배신했다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고향을 찾아 올 엄두를 못 냈어. 우린 약혼한 거나 다름없는 관계였는데 하루아침에 변심하고 배신한 죄책감 때문에 다시 만나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

"난 벌써 그 때 일을 다 잊어버렸는데."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고. 사실은, 내가 그 때 장 선생을 배신하고 서울로 도피해 간 건 누구한테서 얻어들은 가짜 뉴스 때문이었어.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하기 거북해. 그런 말을 믿은 게 내 잘못이었지. 자세한 말은 그 때 일을 돌이키는 것이 되니 허지 말자." 

"그때는 나도 얼마간 충격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우리 언니가 내 마음을 다독거려 주었어. 젊은 남녀 간에 마음 변하기는 장마 끝에 여우비 같은 거라고, 그냥 웃어넘기라고 하는 말이 나를 위로해 주었어. 한쪽은 연인관계로 보는데, 다른 쪽은 친구관계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많다는 얘기였는데, 우리 관계도 그런 것일 거야. 김달호가 나 때문에 고민이 컸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탓인지도 몰라."

"그 언니야말로 고마운 사람이네. 하여간, 그 땐 장 선생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나의 결혼이 오래 지체되었고, 고향 찾는 일도 어려웠지. 마침 우리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옮겨가게 되어서 고향 떠나기는 쉬웠지만." 

"근데 펜션 방을 보자니까, 싱글이네. 홀애비야?"

"그렇게 됐어. 나의 부부생활은 늦게 시작되고 일찍 끝나버린 셈이여." 

"그렇게 된 내력을 물어보면 또 심란해지겠지?"

"그래, 맞아. 하여간 그것도 내 잘못이었지. 난 첫 번째 여자를 배신한 죄에다가 두 번째 여자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한 죄까지 죄값을 무겁게 받은 셈이라." 

"김달호가 죄값을 무겁게 받았다면, 고지식한 탓일거야. 이제랑 훌훌 털어버려." 

"그런데, 집에서 장 선생 기다리는 사람 있는 거 아녀?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됐잖은가."

"걱정 마시오. 오늘 저녁은 30년 만에 만난 남자와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그거, 정말인가? 그럼 우리, 음식점으로 가보지 그래. 난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만 그려 본 벚꽃잔치인데 조금이라도 밝은 시간에 나가 보자고."

"밤 시간에 보는 벚꽃 풍경은 또다른 운치가 있소이다."

아래로 내려와서 차에 오르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이 우리 동창들 술 마시는 시간이라는데, 우리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들키는 건 아닌가?"

"나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 걱정 마요. 동창들 모이는 곳과 반대 쪽으로 가면 되니까." 

둘이 찾아들어간 식당은 벚나무들이 즐비한 가로의 끄트머리쯤 되었다. 자동차를 대로변에 세우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왁자지껄 손님들이 많았다. 둘러보았더니 이 식당 손님들은 동남아의 어떤 나라 사람들인지 얼굴색이 다르고, 입고 있는 옷들도 알록달록 이색적인 색깔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앉으려는데, 차 주인은 주차 공간을 골목 안으로 바꾸어 달라는 식당 주인의 당부를 들어야했다. 여자가 잠시 나갔다가 들어오자 남자가 한 마디 했다. 오랫동안 참고 있던 말인 듯이 조심스러운 어조였고, 애써서 웃음 띠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 선생이 고급 차를 타는 건 뉴스깜인데. 고급 옷은 못 입는데, 고급 차는 타도 괜찮은가?" 

"김달호에게서 그런 말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던 중이었어. 옛날에도 내가 입는 옷을 가지고 품평회를 자주 했었잖아. 사회적인 위화감 어쩌구 하던 그 버릇 아직도 그대론가?"

"장 선생이 나를 좋아했던 이유가 그런 꼬장꼬장한 버릇 때문이 아니었나? 난 지금도 그런 버릇 그대로여."

"나도 고급 옷 고급 차를 사지 못하는 것이 꼭 김달호가 나타나서 까탈 부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거 같아. 김달호 성질이 옛날 그대로라면 나도 안심이여. 요즘 내가 타고 다니는 차는 시한부야, 시한부."

"시한부라니, 그게 무슨 말인고?" 

"내가 전에 타던 자동차가 수명이 다 되어 차를 바꾸게 됐어. 주문한 새 차가 나오는 동안 렌트카를 임시로 빌려 타고 있는 거야. 내 평생에 한 번 고급 차를 타보자 하고 지금 일주일 째 타고 있는데 역시 고급 차는 나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야. 시험적으로 타 보자는 건데, 시골마을에서 뼈가 굵은 옛날의 내가 아직 건재 하는구나 싶어.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탄 고급 차를 어떻게 바라볼까, 이런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낯이 따가워지는 거 같아." 

식사 중에 나눈 다른 이야기도 그랬다. 남자 편에서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막막할 때는 옛날에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이켜 보면 뭔가 힌트가 잡히는 것이었다. 남자는 과거에 여자의 마음 바탕이 어떤 방향성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으니 지금도 여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가늠할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30년 전 그때 남들이 건성으로 말하는 가짜뉴스에 현혹되어서 여자를 엉뚱하게 오해하고 불신했던 것이 마냥 부끄러웠다.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살았고, 동갑 나이인데다, 10년 이상을 같은 학교에 다닌 사람, 가족이나 진배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그 때는 무슨 망령이 들었던 것일까. 저녁식사를 마치면서 남자가 말했다.

"귀가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나를 펜션까지 태워다 주고 얼른 가보도록 하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기다리는 사람 없다니까 그러네. 두 사람이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펜션에 다시 들어가야지."

김달호는 자기가 왜 이리 센스 없는 사람인지 다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