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81] 일상을 깨뜨린 우리의 비둘기

안전지대로 피신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직장으로 출근하고, 낮을 무사히 넘길 수는 있겠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저녁이 되면 어디로 가야 하지? 밤은 또 어디에서 보내고? 도망치는 마당에 비둘기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새하고는 한 지붕 아래서 단 하루, 단 하룻밤, 단 한 시간이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이 내 확고부동한 생각이야. 그러니 오늘 밤, 아니 그 이후의 며칠도 호텔에서 묵을 준비를 해야겠군. 면도기와 칫솔과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가야지.
-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 중에서
조나단은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복도에서 비둘기와 마주친다. 꿈쩍도 하지 않고 쳐다보는 동그란 눈, 갈퀴 같은 빨간 다리, 울긋불긋한 깃털, 여기저기 흩어진 배설물에 그는 진저리를 친다. 눈을 마주쳤는데도 비둘기는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집 앞에 떡 버티고 있던 비둘기를 피해 간신히 집을 빠져나온다.
조나단은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고 불안해한다. 이젠 직장에서도 잘릴 거라며 초조해진 그는 자신도 곧 길거리에서 마주친 걸인처럼 추락할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한다. 두 번 다시 비둘기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텔로 향하며 자살을 결심한다.
조나단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사회인이다. 그런데 비둘기라는 외부의 침입자 앞에서 안정감은 너무 쉽게 무너진다.

설마, 비둘기 한 마리가 사람을 저토록 공포에 몰아넣을 수 있을까, 의아하던 독자는 두려움에 빠진 조나단의 하루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끝내 자문하게 된다. 나의 비둘기는 무엇일까? 어떤 침입자가 나의 일상을 속수무책 두려움에 빠뜨리며 평온을 허물어뜨릴 수 있을까?
설거지하고 있는데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이상한 사이트가 요청한 인증 번호 확인 메시지다. 해킹인가, 불안했다. 일상을 지탱하는 건 거대한 담장이나 튼튼한 문이 아니라 아무도 침입해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무너졌다.
국민 절반이 사용하는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가 해킹당해 고객의 유심 정보가 유출됐다. 도망가야 하나? 어디로? 어떻게든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휴대폰을 켤 때마다 물을 것이다. 혹시 그 비둘기, 아직도 거기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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