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급부터 시작한 일, 나의 두 번째 명함 [2030 세상보기]

홍천에 와서 가장 처음 부딪힌 질문은 "지금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였다. 콘텐츠를 만들던 사람이었고, 팀을 이끌기도 했지만, 내 쓸모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이 지역에 자발적으로 정착한 여성이 아니었다. 남편의 발령이라는 타인의 결정으로 이주했고, 내 경력과 스킬은 그 어떤 기회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지역 사람들과 소통하다 보면 고민의 접점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갑작스러운 직장 발령으로 홍천살이를 시작해 친구를 찾기도 하고, 창업을 준비하거나 사업 확장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천의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운영자 대다수가 고용과 마케팅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인재를 찾지 못하거나 인력난에 허덕인다.
나에게도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들이 들어왔다. 뭔가 해보자고 말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 일이 처음이었다. 판은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같이 해요" 그 말은 어쩌면, "당신이 좀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말과도 같았다. 뭔가 해보고 싶은 사람들과, 뭘 할 수 있을지 감도 못 잡은 나. 그 사이에서 나는 혼자서 일을 짜고, 역할을 만들고, 움직여야 했다.
홍천살이를 시작하며 가장 친해진 인물은 현재 함께 브랜드를 키우는 대표다. 그는 전국에 4개 직영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지역 안에서 '같이 사업을 확장해갈 사람'을 찾는 건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나는 커피도 잘 모르고, 마케팅도 해본 적 없었다. 물건을 파는 일은 더욱이 해본 적 없는 초짜다. 일을 배우기 위해서, 이 일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 6개월을 무임금으로 일했다. 그해 나는 강원도 온라인 마케터 양성사업에 지원했고, 우수 마케터로 선정되었다. 처음엔 커피 용어조차 낯설었고, '브랜딩 실무자'라는 정체성은 나와 무관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일하고 있었고, 그 일은 점점 내 것이 되어갔다.
브랜드 디렉터로 일한 지 2년 차다. 브랜드 리뉴얼을 마쳤고, 네이버스토어 매출은 4배 가까이 성장했다. 올해는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주관하는 '2025년 로컬크리에이터'로 최종 선정되었다. 지역자원을 활용해 고유한 가치를 창출하는 창업가를 발굴·지원하는 이 사업에 우리 브랜드가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단순한 매장 운영을 넘어 지역과 연결된 콘텐츠, 브랜딩, 사람 이야기를 기획해낸 성과였다.
이 일은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기자에서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는 여성에서 지역과 브랜드의 관계를 기획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 변화는 경력 단절과 전환의 경계에서 생긴 감정, 지워졌던 커리어를 재구성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직장을 떠난 뒤, 경제적 주체로 살지 못하던 시절은 끝없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장을 볼 때도, 아이 물건 하나 고를 때도 이전엔 없던 주저와 계산이 따라붙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나'로 지내는 삶은 나 자신을 가장 지치게 했다.
지금도 이 일이 완전히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생계를 책임지는 구조는 아니고, 여전히 배워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나는 지역에 밀려 들어온 여성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과 정체성을 재구성해가고 있다.
경력단절이 아니라 '경력무력화'였던 시간을 지나, 지금 나는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두 번째 명함은 어느 날 누가 준 게 아니라, 내가 다시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김도담 지역가치창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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