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적 권력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역사상 가장 드넓은 학문 영역을 탐구한 철학자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탐사의 촉수를 뻗은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은 높은 곳과 함께 낮은 곳에도 머물렀다. 물속에서 꼬물거리는 올챙이, 풀잎에 붙어사는 진드기도 이 철학자의 눈을 비껴가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미물을 연구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앞 시대 철인 헤라클레이토스 일화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성을 듣고 이방인들이 이 은둔의 철학자를 만나러 숲속 오두막을 찾아왔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쬐는 모습을 보고 방문객들이 놀라 멈추어 섰다.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초라한 모습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들어오시오. 여기에도 신들이 머물고 있다오.” 아궁이 같은 하찮은 곳에도 신들이 깃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낮은 곳을 관찰하던 눈을 들어 가장 높은 곳, 하늘 저 너머에 있는 신(theos)을 탐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신을 ‘자연학’과 ‘형이상학’에서 ‘부동의 원동자’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다. 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은 질료 없는 형상, 곧 신체 없는 정신이라는 뜻이다. 순수하고 완전한 정신은 그 자신은 운동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한다. 그래서 ‘부동의 원동자’다. 신은 제자리에 머물러 하늘의 별들을 회전하게 한다. 그 회전과 함께 태양이 황도를 따라 돌고, 태양의 운동이 지상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낳는다.
그러면 신은 어떻게 스스로 운동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하는가? 그 비밀이 사랑과 욕망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별들이 신을 사랑하고 욕망해 신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결과가 천체의 원운동이다. 별들은 신을 사랑하기에 신에게 다가가려는 열망으로 영원히 하늘을 회전한다. 신은 별들의 사랑을 받는 부동의 인격적 주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생각을 어디서 얻었을까? 플라톤의 ‘향연’(symposion) 후반부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관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는 ‘천체와 신의 관계’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 대화편에서 젊은 알키비아데스는 ‘사랑하는 사람’(erastes)으로, 스승 소크라테스는 ‘사랑받는 사람’(eromenos)으로 나온다. 그 시절 아테네에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보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더 참된 사랑으로 보는 문화가 있었다. 그 문화 속에서 나이 어린 남자와 더 성숙한 남자가 연인 관계를 맺어 애정과 우정을 함께했다. 아테네 제일의 미남 알키비아데스와 추남의 대명사라 할 소크라테스가 그런 관계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술기운을 빌려 젊은 날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연모한 나머지 스승을 유혹하려고 어떤 짓을 벌였는지 털어놓는다. 소크라테스의 사랑을 받으려고 온갖 궁리를 하던 알키비아데스는 어느 날 밤늦도록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하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자기 외투를 벗어 덮어주며 소크라테스를 두 팔로 껴안는다. 그러나 날이 새도록 소크라테스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은 통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내 청춘의 매력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했다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노예처럼 매여 스승의 주위를 맴돈다.
알키비아데스는 신처럼 자신을 압도하는 소크라테스를 ‘아토포스’(atopos)라는 말로 묘사한다. 아토포스는 ‘토포스(topos, 자리·장소) 없음’을 뜻한다. 자리가 없고 장소가 없는 사람이 아토포스다. 아토포스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사람, 그래서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다가갈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 아토포스다. ‘사랑하는 자’ 알키비아데스가 보기에 ‘사랑받는 자’ 소크라테스야말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신적인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받는 아토포스’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신, 곧 ‘부동의 원동자’를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신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곳에 머물러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20세기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에게서 보이는 ‘사랑의 관계’를 분석했다. 사랑의 관계는 일종의 구조여서 누구나 그 관계에 들어서면 똑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고 더 적게 사랑하는 사람이 강자다. 약자는 사랑하고 강자는 사랑받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의 베르테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연인 로테는 ‘사랑받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매인 자, 사랑의 노예다. 반대로 사랑받는 사람은 신과 같은 자리에서 노예를 내려다본다. 사랑하는 약자는 사랑받는 강자를 중심에 두고 끝없이 돈다. 이것이 사랑의 권력관계에서 작동하는 중력 법칙이다.
능동과 수동은 사랑의 관계에서는 역설에 빠진다. 여기서는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수동태로 머문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에게 허락된 것은 ‘기다림’이다. 사랑하는 자는 말한다. “기다림은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다림은 사랑에 빠진 자의 숙명이다. 여기에 권력의 본성이 있다. 바르트는 말한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자족적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돌게 하듯이, 사랑의 권력관계 안에서 사랑받는 자는 부동의 원동자처럼 사랑하는 자를 하염없이 자기 주위로 돌게 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에 자족적인 신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랑받는 사람이기만 했다면 소크라테스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말썽꾸러기 알키비아데스를 바른길로 이끌려는 도덕적 지도자의 모습도 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게는 세상이 올바른 질서 속에 있도록 그 질서를 이끄는 주재자의 모습도 있다. 그렇기는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에서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자기 안에 머물러 사랑받기만 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신의 모습이다. 이 신의 자리에 있는 자가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받는 사람’이다. 천체가 신을 욕망해 한없이 원운동을 하듯,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게 다가가려고 그 주위를 돌고 또 돈다.
바르트가 그려 보이는 사랑의 권력관계는 연인들의 사적인 영역에만 있지 않다. 공적인 정치 영역에서 그 권력관계는 더없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신과 같이 사랑받고자 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정치 영역이다. 정치 영역에서 나르시시즘은 상대를 유혹하여 포획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르시시스트 정치인은 대중을 말로써 현혹하고, 현혹으로 안 되면 안팎의 위협을 부풀려 불안을 키우고 그 불안으로 대중을 길들인다. 그렇게 길들여 권력을 쥐면 나르시시스트들은 곧바로 신과 같은 자리에 올라서서 그 자리를 지키려 모든 수단을 끌어들인다.
막스 베버는 ‘정치라는 직업’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이런 자기애적인 정치를 ‘권력정치’라고 불렀다. 권력정치인에게 정치란 위세를 즐기는 허영의 세계다. 허영심을 충족시키려고 정치를 이용하는 자들이 권력정치인이다. 권력정치인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 자체, 다시 말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기 자신이다. 권력정치인의 제일 관심사는 공익이 아니라 그 자신의 위세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적 자기만족을 뒤쫓는 권력정치인이 창궐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권력정치인에게 민주주의 제도와 정신은 할 수만 있다면 치워버려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 내란 세력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권력정치의 생리상 난데없는 일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적 권력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공화국이 요구하는 정치인은 사랑받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자, 사랑받으려면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자다. 사랑을 주거나 거두는 주체는 국민이지 권력자가 아니다. 정치인이 나라의 주인을 제대로 섬기지 않을 때 그 사랑을 거두어들일 수 있어야 정치가 정치다워진다. 이 나라가 참된 민주공화국이 되려면 권력정치에 중독된 자들,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고 정치하는 자들을 정치의 장에서 말끔히 퇴출해야 한다. 그 권력정치의 지배를 연장하려고 법기술을 악용하는 법비들을 법이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들어내야 한다. 권력정치에 대한 눈먼 사랑이 사라질 때 국민이 주인으로서 존중받는다.

고명섭 | 언론인.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kallipolis9@naver.com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민간인’ 김건희 “대선에 영향 우려”…황당 이유로 검찰 출석 거부
- 대구·경북 찾은 이재명·김문수, 모두 ‘박정희 마케팅’
- 이재명 “외교는 언제나 국익 중심…중국·대만에 ‘셰셰’ 내 말 틀렸나”
- 김문수, 배현진에 “미스 가락시장” 성차별 발언…망언 ‘업데이트’
- ‘어른’ 김장하,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 새긴 29자 그대로의 삶
- [단독] ‘탄핵이 필요한 거죠’ 윤석열 풍자 고소 KTV, 결국 소 취하
- ‘윤석열 출당’ 거부한 김문수…민주 “비뚤어진 충성심, 국민이 심판”
- 검찰, 칠순 ‘문재인 전 사돈’ 목욕탕까지 찾아가…보복기소의 전말
- 전광훈 “천만명 가입 땐 백만원 연금” 광고, “가능성 없어” 거짓 아니다?
- 공개석상서 극언 ‘김문수 리스크’…국힘서도 “선거 전략 무의미” 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