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린바이오와 레드바이오를 넘나드는 누에산업

방혜선 농촌진흥청 농업생물부장 2025. 5. 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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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혜선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장

우리나라 누에치기의 역사는 삼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과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에 이르기까지 누에치기는 역대 군왕들이 적극 장려한 농업이었다.

조선 시대 양잠은 농업과 함께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왕은 친히 밭을 갈아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에게 일깨웠고, 왕비는 궁중에서 누에를 기르며 양잠을 독려했다. 해마다 누에를 치는 5월이 되면 왕비가 백성에게 누에씨를 하사하는 전통도 있었다.

서울의 잠실(蠶室)과 잠원(蠶院)이라는 지명은 바로 그 시절 누에를 키우고 뽕나무를 가꾸던 터전에서 유래했다. 양잠은 오랜 세월 동안 국가 정책산업의 중심에 있었다.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가파른 길목에서 누에산업은 조용한 주역으로 활약했다. 누에고치 생사 수출은 전체 수출의 7.5%를 차지하며 농업 분야 수출 1위를 담당했다. 50~60세 이상되는 성인 중 농촌에서 자란 분들은 당시 농촌의 봄날, 누에가 뽕잎을 먹는 '사각사각' 소리는 봄비 내리는 소리와 닮아 자장가처럼 들렸다고 회상한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는 간식이 귀하던 시절 하굣길에 만나는 귀한 영양 간식이었다. 누에와 오디는 산업을 넘어 국민의 일상과 추억 속에 깊이 스며 있었다.

오늘날 양잠산업은 고부가가치 그린바이오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홍잠(弘蠶)'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누에'라는 뜻의 홍잠은 누에가 고치를 짓기 직전 '익은 누에(熟蠶)' 상태에서 수증기로 쪄 동결건조한 바이오 소재로, 단백질과 아미노산, 오메가3 지방산, 플라보노이드, 폴리페놀 등 풍부한 기능성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23종의 누에 품종을 바탕으로 홍잠의 기능성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흰고치를 짓는 품종(백옥잠)은 간암 악성종양 증식인자를 58% 억제하였고, 간염과 관련하여 간 손상여부와 정도를 판단하는 지표인자도 급격히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노란색 고치를 짓는 품종(골든실크)은 알츠하이머 치매의 원인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 축적을 50% 줄였고, 파킨슨병의 원인인 뇌세포 사멸을 억제한다. 홍잠의 기능성 연구 결과는 곤충단백질 중 건강기능식품으로의 활용을 위해 산업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오디 역시 '동의보감' 등 고문헌에 기록된 효능을 토대로 연구한 결과, 위장 운동 촉진 효과가 기존 치료제(메토클로프라마이드) 대비 두 배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미국 식품의약청(FDA)에 신규 건강기능식품(NDI) 등록을 신청하고, 간 건강 개선 관련 인체적용시험을 통해 효과가 입증되면 식약처에 건강기능식품 원료 등록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처럼 양잠의 활용 범주는 건강기능식품, 의약 소재 등 그린바이오와 레드바이오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기능성 식품 소재로서의 누에 개발은 세계 최초로 국내 양잠농가의 소득 창출에 기여하며 과거 실크 중심의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양잠산업은 제2의 도약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 농식품부에서는 '양잠인의 날'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했고, 지난 9일 수원 국립농업박물관에서 열린 제2회 행사가 열렸다. 양잠산업의 소중한 가치를 계승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술 개발 촉진, 유통·소비 확대, 대국민 홍보 등을 선언하는 실로 전통과 현대가 만나 미래를 여는 자리였다.

누에는 일생에서 네 번의 허물을 벗고 마침내 고치를 만든다. 양잠산업 역시 1970년대 수출산업의 주역 자리에서 누에와 뽕나무농가 수는 1200 여 곳으로 줄었지만, 첨단바이오산업의 한 축으로서 고부가가치 소재 개발을 통해 국민 건강뿐만 아니라 해외수출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를 꾀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명주는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짜야 완성된다. 씨줄과 날줄이 맞물려야 비로소 고운 비단이 되듯, 농촌진흥청 연구진과 양잠인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대한민국 양잠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이다.

방혜선 농촌진흥청 농업생물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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