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시대를 관통하는 창업가정신의 본질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벤처창업학회 회장 2025. 5. 13.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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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벤처창업학회 회장)

최근 우리 경제는 저성장 고착화, 청년실업,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라는 복합위기 속에 놓여 있다. 이처럼 구조적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창업은 단순한 기업활동을 넘어 경제활력 회복, 일자리 창출, 산업의 전환을 이끄는 핵심축으로 재조명된다. 그러나 창업의 역사와 정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묻는다. 과연 우리나라 '최초의 창업가'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인물 찾기를 넘어선다. 한국에서 창업의 개념은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른 의미로 진화했다. 상업을 천시한 조선시대, 산업화가 본격화한 해방 이후 기술혁신이 경제의 중심이 된 21세기까지 창업은 정치, 경제, 사회구조와 긴밀히 연결됐다. 따라서 '최초의 창업가'는 정해진 단일 인물이 아니라 시대적 창업가정신의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은 상업이 억압받던 시대에 신분의 벽을 넘어 인삼무역으로 부를 일궜다. 그는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상즉인의 철학으로 신뢰와 담대함에 기반한 경영을 실천한 고전적 창업가다. 그러나 중농억상 정책과 신분제 사회는 그의 성공을 산업발전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1898년 서울에 전차와 전등을 도입한 한성전기회사 설립을 주도한 미국인 헨리 콜브란은 한국 최초의 외국인 기술창업가로 평가된다. 고종의 출자와 콜브란의 경영이 결합된 이 회사는 공공-민간-외자 협력모델의 효시로 기능했지만 일본 자본에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그 실험은 식민지경제에 편입되는 한계를 맞았다.

근대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제일국립은행을 통해 한반도 금융시장에 진출하고 화폐발행과 철도투자로 실질적 경제지배를 시도했다. 현재 일본 1만엔 지폐의 인물인 그의 행보는 외형상 산업화를 촉진했지만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창업의 독립성과 자율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 기반 창업이 등장한다. 조홍제는 군북산업, 삼성물산 공동창업, 효성그룹 독립을 통해 섬유, 타이어, 무역 등 다양한 산업을 개척했다.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시작으로 건설, 조선, 자동차 등 불모지 산업을 일구며 자수성가형 창업가의 상징이 됐다. 이들은 산업화 시대의 창업가정신을 대표한다.

1980년대 이후 기술 기반 벤처창업이 새로운 국면을 연다. 통계물리학자 이용태는 삼보컴퓨터, 데이콤, 두루넷 등을 설립하며 한국 최초의 기술 중심 벤처생태계를 주도했다. 그는 데이터통신과 초고속인터넷산업의 토대를 마련하며 국가 인프라 확장에도 기여했다.

1985년 메디슨을 설립한 이민화는 국내 최초로 초음파 진단기를 국산화하고 벤처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이끌었다. 메디슨 출신 직원 중 100명이 넘는 기업인이 탄생하며 벤처생태계 확장의 기폭제가 됐다. 이후 네이버, 카카오, 토스 등 플랫폼기업들이 기술창업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며 디지털 시대의 창업가정신을 구현한다.

이처럼 우리 창업의 역사는 외래 기술 이식형 모델에서 시작해 자생적 산업 창업, 기술 중심 벤처, 그리고 디지털 플랫폼 중심의 창업으로 진화했다. '최초의 창업가'를 특정하는 작업도 의미 있지만 오늘날 중요한 것은 시대에 맞는 창업가정신을 재정의하고 계승하는 일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정신, 사람을 남기는 장사의 철학, 기술을 통한 사회혁신. 이것이 우리가 다시 살펴봐야 할 진정한 창업가정신의 본질이다.

앞으로의 창업가정신은 단지 경제적 성공이나 기술혁신에 그쳐서는 안된다. 기후위기, 고령화, 불평등 심화, 지역소멸 등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는 창업가의 역할을 사회 전체의 변화를 견인하는 전략적 축으로 격상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창업가는 공동체와 공익, 생태적 지속가능성까지 포괄하는 가치 중심의 리더여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이윤'을 넘어선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는 창업가정신, 인간과 기술, 공동체와 시장이 공존하는 창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대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벤처창업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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