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호러 다 된다… 美 브로드웨이 제친 英 웨스트엔드의 진화

세계 공연의 양대 메카는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의 웨스트엔드. 뉴욕이 팬데믹 후유증과 제작비 폭등으로 주춤하는 사이, 런던 웨스트엔드 관객 수가 브로드웨이를 추월했다. 현지 집계에 따르면, 웨스트엔드의 2024년 관객이 브로드웨이보다 약 490만명 많았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은 웨스트엔드 공연계 약진의 가장 큰 동력으로 공연 산업 활성화를 위한 영국 정부의 세금 감면 정책 등을 꼽았다. 셰익스피어의 나라다운 저력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와 저렴한 제작비 환경에서 다양한 실험을 마다치 않는 웨스트엔드의 전통도 큰 몫을 했다는 평가다.
‘레미제라블’ ‘캣츠’ ‘오페라의 유령’ ‘빌리 엘리어트’ ‘마틸다’ 등 세계를 사로잡은 수많은 대형 공연이 런던에서 태어난 뒤 뉴욕을 거쳐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런던의 공연장들은 지금도 라이브 무대의 한계를 극복하며 끊임없이 표현의 영토를 넓혀가는 화제작들로 뜨겁다.

◇日 애니 원작 ‘이웃집의 토토로’
‘이웃집의 토토로’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걸작 애니메이션의 동화적 판타지를 그대로 무대로 옮겨온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 제작 연극. 어머니 요양을 위해 시골로 이사 온 자매가 신비한 존재 토토로를 만난다. 바비칸센터에 이어 질리언 린 극장으로 옮겨 와 매회 전석 매진에 가까운 대흥행 중이다. 객석에 다양한 언어를 쓰는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은 것도 특징. 런던에 가면 꼭 봐야 할 공연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국내에서도 일부러 이 공연을 보러 런던에 가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RSC는 정작 극중 토토로의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 라이브 무대에서 직접 만나라는 뜻. 거대한 토토로가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비밀은 퍼핏(꼭두각시 인형)이었다. 웨스트엔드는 특히 ‘워호스’ ‘파이 이야기’ 등 놀라운 퍼핏 라이브 액션에 강했다. 14명의 퍼핏티어(인형사)가 움직이는 거대한 토토로와 고양이버스가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찡하게 벅차오른다. 무대를 벗어나 거대한 나무처럼 이어지는 세트 위에 악사들을 배치하고 귀에 익숙한 애니메이션 속 노래를 라이브로 들려줄 때면 흥얼흥얼 따라 부르고 싶어진다.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도 무대에

‘기묘한 이야기 : 최초의 그림자’는 기록적으로 흥행한 넷플릭스의 대표 SF 호러 시리즈의 전사(前史)를 다루는 프리퀄 연극이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토토로’와는 정반대 의미에서 놀라운 연극. 원작 설정대로 현실 세계 이면에 숨겨진 ‘뒤집힌 세계’가 무대 위에 재현되는 특수 효과가 주는 공포는 압도적이다. 미군 전함 USS앨드리지에서 진행됐다는 초자연 현상 실험으로 시작하는 오프닝부터 관객은 숨이 막힌다. 불길한 검은 새떼가 무대를 휘감고,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라이브로 실감 나게 구체화된다. 뒤집힌 세계의 괴물 데모고르곤의 촉수에 붙잡힌 사람들이 공중에 떠올라 살해될 때는 우둑우둑 뼈가 꺾이는 소리에 객석에선 비명이 터진다. 라이브 공연이 제공할 수 있는 오락성의 한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뮤지컬 본질에 충실한 ‘벤자민 버튼…’

올해 영국 공연계 최고 영예인 로런스 올리비에상 뮤지컬 작품상을 받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정석에 충실한 작품도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웨스트엔드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품.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미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을 영국 콘월 어촌 마을 배경으로 옮겨왔다. 배우 13명 전원이 무대 위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며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하는 ‘액터 뮤지션’ 공연이다. 인생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벤자민 버튼이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오프닝부터, 13명의 액터 뮤지션이 연주하는 음악적 에너지에 허름한 시골 포구처럼 꾸며진 무대가 징징 울리는 듯하다. 약 400석 규모의 중극장인 앰배서더 극장은 매일 밤 발 디딜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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