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포럼] 5월 랩소디(rhapsody)-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knnews 2025. 5. 12. 19:3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사무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중목 양말을 신은 복숭아뼈까지 한기가 내려간다.

이윽고 발가락까지 시리다.

똑같은 자리지만 오전과는 사뭇 다른 사무실인 것 같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무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서서히 무릎이 서늘하다. 중목 양말을 신은 복숭아뼈까지 한기가 내려간다. 이윽고 발가락까지 시리다. 이제 몸을 일으켜야 할 시간이다. 바닥을 치고 일어서야 하지만 엉덩이가 무겁다. 뻣뻣한 목을 돌리니 비닐 커튼에 빗물이 듣는 중이다.

점심을 먹지 않은 새들이 먼저 날아올라 시야에서 사라진다. 새의 꽁무니를 뒤따르는 하늘길이 젖어간다. 빗물은 내 발자국도 씻어준다. 나의 지나온 땅길에도 비가 내려서 아무 흔적이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뿌리 뽑힌 풀꽃이나 과자 봉지처럼 사람도 사라지면 잊히는 것이 마땅하리라.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늘 슬프기 마련이다.

그래도 저마다 잊히지 않는 몇 사람쯤은 있으리라. 사라졌으나 어느 순간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 빗방울같이 종종걸음으로 앞서간 사람 하나. 빈 술잔을 말없이 채워주는 사람 둘. 휘청거리는 귀갓길을 애써 밝혀주는 가로등 같은 사람 셋. 달빛으로 찾아와 등줄기 식은땀을 닦아주는 사람 넷. 함께 일어나자고, 그래도 눈을 떠야 한다고 자명종을 울리는 사람 다섯. 그리고 여섯, 일곱, 여덟….

어쩌면, 그 잊히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내 속으로 들어와, 어느새 내 안에 자리 잡고 앉아서, 지금의 ‘나’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유전자의 총체가 지금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 과학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분적으로 닮고자 하는 속성이 있으니까. 내가 잊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더라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참 외로운 설정인 것은 분명하다. 저 빗물처럼 흘러서 어디 먼 곳으로 가든지. 아니면 햇볕에 증발해서 허공으로 사라지든지. 우산을 들고나가 우산 없이 돌아오던 날처럼 그냥 잊자.

아주 어린 내가 우물가에 세워둔 자전거 바퀴를 맨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출퇴근용으로 쓰던 우리 집 자전거였다. 깨끗하게 씻은 바큇살이 눈부신 정오 무렵이었다. 옆에는 옆집 할머니가 빨래하고 있었다. 작은 몸집에 은빛 비녀를 꽂고 허름한 한복을 입었다. 공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있어서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바퀴를 돌리려 페달 쪽으로 움직이다가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자전거는 할머니 쪽으로 넘어졌다. 할머니의 비명과 나의 울음소리가 뒤범벅되었다. 마른하늘을 찢는 소리가 울리자, 부엌에서 뛰쳐나온 엄마. 방에서 튕겨 나온 누나들. 나는 똥이 퍼질러진 기저귀를 차고 그저 땡고함만 질렀다. 나는 혼자서 높은 대청마루를 내려와 기다시피 어떻게 우물까지 갔을까. 어린 내가 자전거 만지는 모습을 왜 아무도 보지 못했을까. 그때 내 나이가 세 살쯤이었다 하니, 모든 게 미스터리였다. 더 이상한 것은 나는 왜 그 장면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할까. 그렇게 서럽게 반나절을 울었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깊은 우물 하나와 함께 자라났다.

무엇이라 증명할 수 없지만, 불안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숨통이 트이는 생의 전환점은 늘 경계선상이었다. 지금도 그 미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춤추며 몸부림친다. 내 삶에도 그럴듯한 배경음악이 흐르면 좋겠다.

엉뚱한 생각에 더 오래 앉아 있었다. 어느새 비닐 커튼 사이로 볕뉘가 비친다. 똑같은 자리지만 오전과는 사뭇 다른 사무실인 것 같다. 어디 지구 반 바퀴라도 돌고 온 느낌이랄까. 지금 나의 표정을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다. 점심은 이미 놓쳤고, 이른 저녁을 먹어야겠다. 우물처럼 맑은 술도 한잔 곁들이리라.

아무튼 기념할 것이 참 많은 5월이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Copyright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