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에 깃든 붕괴의 그림자, 의자로 남은 관계의 끝

이성현 기자 2025. 5. 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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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밀레를 향한 오랜 존경 화폭에 녹여내
의자로 남은 갈등의 흔적…고갱과의 공존 끝에 파국 마주
말 없는 정물에 담긴 자화상…붕괴 전야의 침묵을 그리다
생레미 향하기 전, 반 고흐 ③아를 시기(Arles Period)

1888년 2월 20일, 반 고흐는 프로방스의 따스한 태양을 기대하며 남프랑스의 도시 아를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60㎝가 넘는 눈이었다. 낯선 풍경, 추운 날씨, 불편한 여관방 속에서도 고흐는 곧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를에서의 시작은 혹독했지만, 이후 이 도시는 그에게 가장 빛나는 창작의 터전이자, 동시에 가장 격렬한 고통의 배경이 된다.

사이프러스 나무로 둘러싸인 과수원(Orchard bordered by cypresse), 64.9 x 81.2㎝, 1888. 4, 빈센트 반 고흐는 아를에 오자마자, 봄을 맞은 과수원과 들판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제공

◇ 태양 아래서 밀레를 오마주하다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자마자, 봄을 맞은 과수원과 들판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사이프러스 나무로 둘러싸인 과수원'은 그 시기 고흐가 집중한 연작 중 하나로, 아를의 강렬한 햇살 아래서 피어난 자연의 생명력을 오롯이 표현해낸다. 그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끝없는 솟음과 과수원의 부드러운 곡선을 대비시키며, 단순한 풍경화 이상의 감정과 시간을 담아냈다. 이는 아를의 강렬한 햇빛과 지중해성 기후, 즉 더 선명한 색감이 가능한 환경의 영향이기도 했다.

고흐는 밀레를 '화가 중의 화가'라 부르며, 평생 그의 그림을 존경했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그가 화가의 길을 처음 꿈꾸던 시기부터 마음에 품었던 작품이다. 그리고 마침내 1888년 6월, 그는 이 오랜 존경을 담아 '씨 뿌리는 사람'을 다시 그린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땅을 가르는 나무, 화면을 압도하는 태양, 프레임을 과감히 가로지르는 요소들은 모두 고흐 자신의 감각과 상상이 더해진 구성이다. 특히 강렬한 태양의 묘사는, 당시의 인상주의에서도 보기 드문 과감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고흐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며 색채를 통한 예술의 본질에 다가서려 했다.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 64 x 80㎝, 1888. 6, 고흐는 밀레의 오랜 존경을 담아 해당 그림을 그린다. 땅을 가르는 나무, 화면을 압도하는 태양, 프레임을 과감히 가로지르는 요소들은 모두 고흐 자신의 감각과 상상이 더해진 구성이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제공

◇ 의자로 표현한 초상, 갈라진 관계의 은유

고흐는 아를에서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라마르틴 광장의 '노란 집'을 얻는다. 그는 이곳을 화가 공동체의 시작점으로 만들고자 했다. 동생 테오, 동료 화가 베르나르에게도 함께 살 것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고갱을 초청한다.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처음엔 서로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협력자였다. 고흐는 '노란 집'을 고갱이 편히 머물 수 있도록 직접 꾸몄고, 고갱은 그의 작업을 지켜보며 흥미를 보였다.

그런데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고흐는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손수 정리하고, 그림을 걸고, 가구를 준비했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것이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폴 고갱의 의자'다. 이 두 작품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시선과 성격을 드러낸 상징적 초상이다. 반 고흐의 의자는 투박하고 실용적이며, 담배 파이프와 성냥이 올려져 있다. 반면 고갱의 의자는 곡선이 강조된 고급스러운 의자에 촛대와 책이 놓여 있다. 밝은 주간의 색감과 어두운 야간의 조명 대비도 두 사람의 태도 차이를 시사한다. 고흐는 당시 고갱을 존경했고, 그가 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기를 바랐지만, 결국 서로의 간극을 메우지 못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명확했다. 고갱은 상상력을 통해 장면을 구성했고, 고흐는 대상을 직접 관찰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고갱은 고흐의 즉흥성과 감정적 붓질을 '통제되지 못한 회화'라 평가했고, 고흐는 고갱의 냉정함과 거리감을 견디지 못했다. 생활 방식에서도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정돈과 계획을 중시하는 고갱과 순간의 열정과 직관에 의존하는 고흐는 모든 일상에서 부딪혔다. 결국 고갱은 아를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고흐는 이별의 예감 속에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는 극단적 행동에 이른다. 그 모든 갈등과 감정이 두 개의 의자에 담겨 있었다.

(왼쪽) 반 고흐의 의자(Van Goah's chair), 92 x 74㎝, 1888, 폴 고갱의 의자(Paul Gauguin's chair), 90.5 x 72.7㎝, 1888, 이 두 작품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시선과 성격을 드러낸 상징적 초상이다. 런던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 무너진 일상에서 피어난 침묵의 정물

1889년 1월, 고갱이 떠난 후 고흐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다. 잠시 병원에 입원한 뒤 노란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은 이제 더 이상 '공동체의 꿈'을 실현할 공간이 아니었다. 그 시기 그린 작품이 바로 '양파가 담긴 접시 정물'이다. 식탁 위에 놓인 접시와 그 위의 양파, 빵, 숟가락, 병.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장면엔 오히려 고흐의 가장 깊은 외로움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양파 네 개 중 두 개는 접시 안에, 두 개는 접시 밖에 놓여 있으며, 싹이 난 방향조차 서로 다르다. 단순한 정물 구성 같지만, 이는 고갱과 고흐, 두 사람의 예술관의 차이를 상징하는 장치처럼 읽힌다. 통제된 상징을 선호했던 고갱과 달리, 고흐는 감정과 감각에 의지해 삶을 재현했다. 접시라는 울타리 안팎에 놓인 양파는 예술을 둘러싼 두 사람의 거리감이자, 고흐가 느낀 관계의 단절을 은유한다.

형식적으로도 이 작품은 고흐 회화의 새로운 지점을 보여준다. 단순한 정물화를 넘어 상징적인 물건들을 한 장면에 응축시키고, 강렬한 색채, 거친 붓질, 두터운 임파스토 기법으로 한 인간의 붕괴 직전의 영혼 상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이 정물화가 완성되던 즈음, 고흐의 건강은 다시금 나빠지고 있었다. 1889년 1월부터 5월 사이 그는 여러 차례 짧은 발작을 겪었고, 밤에는 병원에서 지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양파가 담긴 접시 정물(Still life with a plate of onions), 49.6 x 64.4cm㎝, 1889. 1, 고립된 일상, 말없는 시간 속에서 고흐는 다시 그림에 몰두하며 붓을 든다. 그 시기 그린 작품이 바로 이 그림이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제공

◇ 생레미에서 다시 별을 바라보게 된다

아를에서의 15개월 동안, 고흐는 유화 184점, 드로잉과 수채화를 포함하면 3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 치열한 붓질의 이면엔 점점 고조되는 정신적 혼란과 피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갱과의 결별 이후, 그는 반복되는 발작과 외로움 속에서 점차 고립됐고, 마을 주민들의 불신과 경계는 그의 삶에 또 다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결국 1889년 봄, 고흐는 스스로 요양소 입원을 결심한다. 그것은 붓을 내려놓지 않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자, 예술과 생존 사이에서 택한 유일한 길이었다.

그는 그해 5월, 아를을 떠나 생레미의 생폴드모졸 요양소로 향한다. 이곳에서 고흐는 다시 별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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