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시민군 지역에 예술학교 세워 평화인재 키울 것”
[짬] 미얀마 커피 팔아 시민방위군 지원하는 권태훈 사람예술학교 이사장
4년 전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대한 미얀마 시민의 저항과 시가전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한국에서도 미얀마 군정을 비난하는 기자회견과 집회가 잇따르고 시민방위군을 지원하는 후원금이 답지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미얀마의 내전 상황은 여전하지만, 언론과 시민의 관심은 뚝 끊겼다. 4년간 지속적으로 지원금을 마련해 목숨을 걸고 미얀마에 건너가 시민방위군(PDF)에 직접 돈을 전하는 이가 있다. 미얀마 커피를 수입해 팔아서 수익금 전액을 미얀마에 되돌려주면서 “미얀마는 한국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권태훈씨를 지난 2일 만났다.
10여년간 타이의 미얀마 난민촌 방문 아이들에게 합창·악기·댄스 등 가르쳐
2020년 만달레이에 학교 부지 마련
운영자금 마련 위해 미얀마 커피 수입
그가 미얀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사와 방송국 등에서 연출가로 일하다 기독교 인터넷 방송인 ‘시3티브이’(C3TV) 본부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난민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타이 메솟 지역에 미얀마 난민 40만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은 미얀마의 종교적, 정치적 탄압을 피해 타이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권씨는 그곳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한국 수녀님과의 연락을 통해 그곳에 날아갔다. 난민촌에 세워진 학교들을 방문해보니 영어·수학·과학은 많이 가르치는데, 음악·예술교육은 드물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딱 10년만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주변 음악인들을 모아 2014년부터 매년 1월 난민촌을 방문해 합창, 악기, 댄스, 그림, 음악이론 등을 가르쳤다.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얀마는 원래 영국 식민지 아래서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였어요. 당시 아시아 인재들이 도쿄로 유학을 가듯이 양곤대학에도 유학을 갔죠. 1962년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가 장악하면서 우민화 정책으로 예술교육을 없앴어요. 미얀마 아이들이 예술교육을 처음 받아보니까 너무 환희를 느끼고 영혼이 움직이는 게 보이더라고요. 아이들이 초집중하니까 오히려 교사들이 감동을 받았어요.”
그렇게 예술교육의 효과를 목격한 사람들이 그에게 미얀마 본토에도 학교를 세워 예술교육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을 받고 나니 장기적인 목표와 비전이 생기더라고요. 미얀마는 민족과 종교의 갈등이 심한 다민족·다종교 국가입니다. 식민지 시절 영국의 이간질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피의 역사를 가졌어요. 민족 간, 종교 간 원한이 크다 보니 난민이 계속 발생합니다. 민족과 종교가 다른 아이들을 모아서 예술교육을 통해 평화 인재를 키워내고, 이 인재들이 10∼20년 뒤에 미얀마의 리더가 된다면,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죠.”
이것이 그가 2018년 사단법인 ‘사람예술학교’를 설립한 배경이다. 2020년에는 미얀마 만달레이 지역에 학교 부지도 마련하고 건물도 작게 세웠다. 학교 운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2021년 1월 미얀마 커피를 4t 수입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달 미얀마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제가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들과 아이들이 군부와 싸우다가 다치고 죽어 나가는 거예요. 학교 설립은 둘째 치고 일단 미얀마 사람들부터 살려야 했어요. 페이스북에 이 상황을 알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주면서 수입한 커피가 많이 팔려서 시민방위군과 임시정부에 보낼 수 있었죠.”
2021년 당시에는 한국에서 사업하는 미얀마 사람을 통해 돈을 전달했고, 재작년과 지난해에는 권씨가 직접 돈을 들고 미얀마로 갔다. 시민방위군이 장악한 지역은 외국인이 갈 수 없기 때문에, 인도를 거쳐 미얀마 국경 지역까지 간 뒤 거기서 시민방위군을 만나서 돈을 전달했다. 언제 어디서 군부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기에 목숨을 건 전달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걱정하는 건 한국 사회의 줄어든 관심이다. “2022년부터는 뉴스가 싹 사라졌어요. 지금 상황이 더 심각하거든요. 쿠데타군이 헬기로 로켓포를 쏘면서 마을 전체를 쓸어버리고 있어요. 뉴스에서 많이 나올 때는 많은 지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지원이 없으니까 저에게 자주 연락이 옵니다.”
미얀마의 대나무집 하나를 짓는 데 40만원이 든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한국 돈도 미얀마에는 큰 도움이 된다. 요즘에는 쿠데타로 유보된 학교 설립에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내전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지금이라도 시민방위군 장악 지역 중 안전한 곳에 학교를 세워야겠다 싶어서 준비를 하려고 해요. 제 꿈은 미얀마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 공동체를 일군 뒤 학교 뒤에 나무 하나 심는 거거든요.”
쿠데타 뒤 시민군 찾아가 매년 지원 “미얀마 쿠데타는 문명에 대한 도전
시민군 장악 지역에 학교 설립 시동”
방송 일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미얀마 공동체에 이 같은 소명을 갖게 됐을까? 그는 집안에 목사가 3명이나 있는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교회 건축 헌금을 내기 위해 신문 배달을 하고, 첫 군대 휴가는 여름 성경학교 일정에 맞춰 나와서 성경학교 교사를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예수처럼 사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 ‘소셜 프로듀서’로 살아가는 것을 핵심 정체성으로 삼게 됐다. 그가 말하는 ‘소셜 프로듀서’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 결과, 해외에선 난민을 돕는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국내에선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소망교도소의 재소자들을 위한 글쓰기 교실과 미술학교, 바리스타 훈련교육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서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저는 사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인맥도 별로 없는데,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이 다 도와줘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제가 예술교사들을 찾으면 뮤지션들이 자원해주고, 재소자들을 위해 강의해달라고 부탁하면 인문학자들이 흔쾌히 달려와 주시고, 커피로 미얀마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하면 커피 전문가들이 연락 와서 수입부터 로스팅까지 다 도와줬다”며 도와준 이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다 거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호소했다. “미얀마 쿠데타는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 문명에 대한 도전입니다. 미얀마 민주주의의 실패는 우리 문명의 실패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더 이상 사악한 권력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국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그런 만행을 용납하지 않는 문명 세상이어야 합니다.”
한편,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커피는 사람예술학교 누리집(www.saramschool.net)에서 구매할 수 있다. 권씨는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커피를 재배한 미얀마는 유럽으로 커피를 많이 수출하고 있다”며 “미얀마 커피는 신맛과 고소한 맛이 균형이 잡힌 맛으로 평가받는다”고 귀띔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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