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이야기

경북도민일보 2025. 5. 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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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이 빈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담장까지 점령한 나무들이 녹두 빛으로 빚어낸다. 겨울 눈보라에 얼었던 장독대도 녹아든다. 인적이 끊겼을 뿐 대신 나무와 풀, 새들까지 한 달 살기가 아닌 아주 터를 잡은 모양이다. 계절의 오고 간 흔적이 선명한데 어머니의 흔적은 해가 갈수록 지워져 간다. 차마 다 말 못 하고 눈썹 추녀 밑에 서면 바람결에 빈집 기둥의 송진 냄새가 풍긴다.

지난날 시끌벅적하던 집이 어쩌다 이렇게 쓸쓸하고 외로움만 가득할까.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은 움직임이다. 주춧돌 위에 기둥이 정확하게 맞닿아 있듯 가족의 삶도 어김없이 흐를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고향 집이 점점 허물어져 가는데 어머니의 그리움은 더해간다.

요즘 도심 속의 빈집과 시골의 빈집들이 즐비하다. 내가 사는 도시도 재개발 열풍으로 주민들이 떠나고 몇 년째 방지된 채 흉물이 되어 밤이면 무서울 만큼 어둡다. 재개발이란 명분 아래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걷잡을 수 없는 도시 풍경이다. 그렇지만 시골 빈집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현실에 놓여있다고 본다.

시골 빈집은 투기나 재개발과는 무관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자녀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소소한 이것만 봐도 고향집으로 와서 살기는 아주 극소수다. 아이들의 교육문제와 직장, 생계 등등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집은 비바람에 견디다 허물어진다.

도시의 빈 주택이 땅값 문제로 재개발을 멈춘 채 방치되어 있다. 몸값을 높여 버티다가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금속 창틀만 쏙쏙 빼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조차 비켜가는 듯하다. 생동감이 꿈틀거리는 봄날에 어머니의 빈집은 더 처연함 속에 나무들은 푸름을 엮어간다. 이곳저곳 궂은일 기쁜 일이 지워지지 않고 얼기설기 얹혀있다. 기억에서 사라져갈 아름다운 것과 안타까움이 있기에 그것이 삶인가 보다.

어머니의 집은 세월을 묻어갈 끊임없는 재생의 길이다. 이 봄날에 꽃들이 피고 지는 계절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5월이면 어김없이 뒤란 나무 두 그루에 핀 꽃이 밤안개에 떨어지는 오동꽃이다. 아침이면 보랏빛 향기가 꿀벌을 불어들이고 우리들의 잠을 깨운다.

어머니는 농사일 틈틈이 꽃 가꾸기를 좋아했다. 한 해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다. 연내 행사처럼 6월이면 장독대 둘레에 봉숭아꽃이 소박하고 환하게 핀다. 넉넉하지 않은 작은 살림에 4대가 모여 살면서도 수선스럽지 않고 묵묵한 성품을 그때는 몰랐다. 손톱 밑에 든 가시만큼 아팠을 이야기도 자분자분 묻어가며 살아온 것을 가을 해가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난 후 알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여름이면 방과 방 사이에 대청마루의 뒷문을 열고 들문을 포개어 걸면 청대 바람이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흐르는 땀을 식히기도 하지만, 가족 간의 정을 더 두텁게 하는 공간이었다.

왕대 숲에 든 바람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더 그립다. 자식들이 세상에 나가 잘살기를 넌지시 짚어준 말들이 아직도 기억 한쪽에 남아있다. 대나무가 아프게 마디를 만드는 것은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는 듯, 심지가 굳어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지혜롭게 헤쳐가라는 당부일 것이다.

7월은 호박꽃이 피어 흙담을 휘감아 돈다. 시골집의 소박해서 한층 더 정겹다. 꿀벌들이 들락거리는 꽃은 질서 없이 피고 지고 피면 8월의 더위와 긴 장마가 물러가고 9월이면 하늘에 버들구름이 피어올라 맑고 푸르다. 바람 끝이 서늘해져 더위에 지쳤던 마음도 여유가 생긴다. 가을 손님처럼 노란 산국의 냄새는 어쩌면 고향 집의 냄새다.

빈집은 가끔씩 찾아와도 반가운 기색이 없다. 왜 그럴까. 주춧돌과 기둥들이 많은 세월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라는 것일까. 한쪽으로 기운 풍경이 눈에 밟힌다. 이제는 꽃이 피고 천둥 번개 뒤로 내리는 소나기, 그리고 낙엽이 쌓여 늙어간다.

지난날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 시대의 집, 그러나 사람 냄새. 정이 넘쳐나던 집. 정물화 같은 빈집의 이야기는 언젠가 기억 속에만 존재할 것을 알기에 스산함을 넘어 귀하게 느껴진다. 두고 갈 것도 가져갈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옛 흙집들이 사라져가는 이 시점에서 소멸이라는 단어가 아쉽게 다가온다. 대청마루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일이백 년을 훨씬 넘긴듯한데 낡은 집을 새로 고치려니 비용 때문에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방치되어간다. 아직도 송진 냄새가 남아있는 빈집이 애잔해 보인다.

마루에 봄 햇살을 안고 앉아 마당을 바라본다. 올해도 새들이 신혼살림을 차리는지 분주하게 들락거린다. 몇 년째 수양버들이 터를 잡고 연둣빛 꽃을 가지마다 엮어 낭창거리고 나는 빈집 봄 풍경을 찰칵찰칵 담는다.김정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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