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전쟁 간극 뛰어넘고 언젠가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길"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이서후 기자 2025. 5. 12. 16:5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2023년 여름 부산 영상예술집단 '탁주조합'으로부터 서신교환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에 살며 IT 계열 회사에서 일한다는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 수도 키이우를 오가며 전투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식료품을 전달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 편지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오고, 전혀 다른 환경이 처해 있어도 이렇게 소통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담았고, 다시 한번 안전을 기원했다.

언젠가 말씀하신 것처럼 커피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우크라이나 평화활동가와 나눈 편지 (하) 어디서나 당신이 평화롭기를

"비행기로 10시간 걸리는 키이우
메일 나눌 수 있음에 희망 느껴
위험 맞서 잘 견뎌줘 고마워"

"활기 찾은 학교 고무적
지구본 속 우리 환경 아름다워
언젠가 한국 방문하길 바라"

2023년 여름 부산 영상예술집단 '탁주조합'으로부터 서신교환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예술로 풀어보려는 '어떤 물길' 기획 중 하나였다. 세계 다양한 예술가들 사이로 편지가 '흐르는' 걸 보여준다는 취지였다. 나와 편지를 교환하기로 정해진 안드레이 클류치코(35)는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에 살며 IT 계열 회사에서 일한다는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 수도 키이우를 오가며 전투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식료품을 전달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죄책감, 안전을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2023년 10월 27일 첫 번째 편지를 이메일로 보냈다. 답장은 12일이 지난 11월 8일 도착했다. 그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며 안도하면서도 전쟁에 익숙해지거나 애써 무감각해지는 사람들 이야기에 슬퍼졌다. 두 번째 편지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오고, 전혀 다른 환경이 처해 있어도 이렇게 소통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담았고, 다시 한번 안전을 기원했다.

※아래 편지 내용은  이서후 외 18인 공저 <흐르고 흘러>(탁주 조합 기획, 산산프레스 펴냄. 2024)에서 발췌했습니다.

2023년 11월 20일

밤입니다. 종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저는 지금 편안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혼자 사는 저에게 밤은 하루 중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한국은 이제 막 겨울에 접어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사는 창원에 눈이 조금 왔어요. 겨울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긴 해도 창원은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거든요. 예상치 못한 눈이어서 아이들이 더 신이 났었습니다. 조카와 신나게 눈싸움도 했습니다.

구글 지도로 당신이 있는 키이우가 어딘지 자세히 찾아봤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이상 날아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거리네요. 당신은 편지에서 밤이나 이른 아침에 들리는 공격용 드론 소리에 대해 적었습니다. 윙윙거리는 공격용 드론 소리를 듣는 밤의 끔찍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해 봤습니다. 저와 당신 사이, 밤이 주는 평화와 밤이 주는 두려움만큼이나 아득한 거리를 가늠해 봤습니다.

사실 당신과 이렇게 쉽게 편지를 주고받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메일 하나로 순식간에 아득한 거리가 사라지는 듯합니다. 당신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이 사실 만으로도 저는 희망을 느낍니다. 희망이란 어떤 가능성이니까요. 그 가능성으로 저와 당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언젠가 당신과 내가 어느 카페에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운전의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편지에서 운전하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명상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죠. 저도 그렇거든요. 운전은 저에게 기분을 전환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안드레이 글류치코 이야기가 담긴 책〈전쟁을 짊어진 사람들〉 표지. /스리체어스

지난 편지에서 주문했다고 말했던 책을 읽었습니다. 책 속에서 당신은 말했습니다.

"많은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하다고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현실을 회피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위험하다고 멈추지 않아서, 그렇게 지금까지 잘 견디어 줘서 고맙습니다.

키이우에는 이미 겨울이 왔겠군요. 어디서나 따뜻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한국 창원에서 
이서후 드림.

2023년 12월 6일

안녕하세요 이서후님

이메일 보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저에게는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키이우에는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고, 기온은 대부분 영하에 머물러 있습니다. 해는 보기 드물고 낮이 전반적으로 짧아요. 저는 추운 날씨에 개의치 않고 눈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빛이 없는 날에는 가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또한 따뜻한 옷을 입고 벗어야 하기 때문에 거리를 오가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립니다. 그리고 저는 개 두 마리를 키우기 때문에 산책을 자주 나갑니다. 제 개들도 겨울을 좋아하는데 첫눈이 오면 항상 반가워하죠.
지난 달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주거용 건물이 러시아 로켓 공력을 받아 구조대원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 집 창문 앞길 건너편에 학교가 있는데,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장난치는 모습을 매일 봅니다. 지금 전쟁 때문에 모든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학교는 문을 열었어요. 저는 반년 전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긴 침묵 끝에 다시 활기를 찾는 것을 보면 항상 고무적입니다. 학교가 정말 그립네요.

구글 지도를 언급하셨는데, 저는 지도를 정말 좋아해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리부도 책과 지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지구본에서 여러 나라, 도시, 외딴 지역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지구본을 보면서 저는 우리 환경이 얼마나 거대하고 다양한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해서 가끔 가본 곳들이 그리울 때면 지도로 그곳을 다시 찾아봅니다. 이는 그곳의 추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언젠가 저도 한국을 방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정말 흥미로운 나라예요.

책이 마음에 드셨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말씀하신 것처럼 커피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키이우나 창원 또는 지도상 어느 곳에서든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안드레이 클류치코 드림

2024년 1월 15일

안드레이 씨에게

해피 뉴 이어! 최근 좀 바빴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가 버렸군요. 새해가 되었지만,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중동에서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네요. 전쟁터가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 그 전쟁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듭니다.

안드레이 씨는 새해에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저는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고 있어요. 나이가 좀 들고 보니 새해란 건 그저 며칠간의 신선함일 뿐이네요. 우크라이나에서도 새해에 카운트다운이나 불꽃놀이 같은 이벤트를 하나요? 한국에서는 음력 설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새해가 되는 걸 함께 즐긴답니다.

여행을 좋아한다니 우리가 카페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할 게 하나 더 늘었네요. 지금은 직장인이라 못 다니지만, 10여 년 전에는 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한 달을 돌아다녔고, 네팔 히말라야도 한 달 동안 트레킹했어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석 달 동안 걸어서 돌아다녔고, 중국에서도 반년이나 있었어요. 이제 당신이 있는 우크라이나도 꼭 가고 싶은 곳으로 추가해야겠어요.

오랜 여행 경험으로 이제 멀리 있는 나라들을 동경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곳과 이곳을 비교할 일도 없어요.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는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 잘살아 보려고 애쓰고 있어요. 미래를 동경하지 않으니 굳이 지금에 대해서도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아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늘 같이 온다고 합니다. 좋은 일이 오면 그 안에 나쁜 일을 보아야 하고, 나쁜 일이 오면 그 안에 숨은 좋은 일을 살펴야 한대요. 저에게는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어요. 어쨌거나 그날들은 지나고 다시 좋은 하루나 나쁜 하루가 오죠. 그러다 보면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요.  비록 이메일이지만, 당신과 저의 만남에도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이런 게 삶이겠지요.

이제 우크라이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신을 떠올립니다. 걱정할 구체적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쟁은 저에게 그저 남의 일이 아니게 됐습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악수를 청할 날이 오기를.

아무쪼록 건강하고, 무사하길 바랍니다.

한국 창원에서 
이서후 드림

 세 번째 답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마지막 편지를 보낸 지 이제 1년도 더 지났다. 안드레이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종전 협상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3년이 지나도록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선전포고 없이 대규모 침공 공격을 감행하며 시작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은 중동전쟁 역사상 최고 사망자를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카슈미르 총기 테러 사건 여파로 갈등을 빚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7일 새벽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으며 6년 만에 다시 충돌했다. 다행히 곧 휴전에 합의하긴 했지만, 확전 우려는 여전하다.

지금도 이런 전쟁터 어디선가 안드레이 같은 평화 활동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1년도 더 지난 편지를 다시 꺼내 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드레이 같은 이들의 노력으로 전쟁 속에서도 희망과 평화의 씨앗이 뿌려진다.

올해는 광복 80년이자 분단 80년이 되는 해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부터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좋겠다. 어디서든 당신이 평화롭기를 빈다.

/이서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