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민족의 아픈 역사, 뿌리는 여전히 이 땅에

정민엽 2025. 5. 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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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조선인 러시아 이주 시작
대기근 피해 국경 주변 마을 조성
연해주로 터전 옮겨 항일운동
‘일제 첩자 방지’ 명분 이주 명령에
17만명 고려인 중앙아시아 추방
광주 고려인 마을 4712여명 정착
지역 곳곳 독립운동 형상물 조성
영월 출신 조부 둔 신조야 대표
“동포 국적 취득 아직 남은 숙제”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12. 광주 고려인 마을을 가다

‘동서 5리, 남북 30리. 거주하는 백성은 238호 1665명이다. 지경(地境)을 넘어 땅을 개척하고 각처에 들어가 사는데, 유민(流民)의 남녀가 국경을 넘고 러시아로 들어가서 구복(口腹)을 채우되 오직 힘닿는 데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혹 살기를 꾀한 결과 지금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전전하다가 죽어서 구학(溝壑·골짜기)을 메웠으며, 지금에 이르도록 뼈가 사막에 노출되어 음산한 날씨와 비 오는 밤이면 아직도 흐느끼는 소리가 메아리친다.’-지신허촌·아국여지도(1884~1886)에서

고려인(高麗人)은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 국가 연합의 국가들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내 나라 조선을 떠나 먼 타지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역사에는 핍박과 그리움이 남아있다. 강원도민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망의 역사 속에서 조국을 떠나 방황했던 고려인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 고려인 항일무장투쟁부대원들(1918~1922년 사이)

■고려인들의 비극

조선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4년 무렵부터 흉년과 대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며 시작됐다. 이들은 연해주 블라디스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등 조선과 러시아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을 만들어 살았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5년부터는 다수의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이 항일운동을 이어 나가고자 연해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조선인들의 이주는 계속돼 1910년대에는 10만여명에 달했고, 1931년 들어서는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연해주로 터전을 옮겼다.

‘살아남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난 이들은 1937년 들어 다시 한 번 비극을 겪어야 했다. 스탈린은 이들이 일제의 첩자가 될 수 있다며 강제 이주를 명령, 당시 극동지역에 살고 있던 17만여명의 고려인은 영문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척박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열차는 한 달을 넘게 달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멈춰 섰다. 이주 첫해 당시 겨울 추위와 풍토병 등으로 3만여명에 달하는 노약자와 어린이가 사망했다. 사실상 이주가 아닌 ‘추방’에 가까운 가혹한 처사였다.

▲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이 거주했던 흙벽집 초가(1930년대 말)

고려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황무지를 개척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던 척박한 토지는 비옥한 논밭이 됐고, 낙후돼 있던 중앙아시아의 농장은 점차 효율성을 띠게 됐다.

고려인들은 1956년 특별이주민 거주제한조치가 풀리면서 마침내 이동의 자유와 소련 공민권을 갖게 됐다. 이로 인해 일부는 연해주로 되돌아갔으며, 일자리나 학업 등을 위해 대도시나 캅카스 등 소련 내 전역으로 분산됐다.

이들은 1991년 말 소련이 붕괴하며 다시금 신상에 변화가 발생한다. 경제난이 가중되고, 소련 내 각 공화국이 독립하면서 각지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었다.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탄압받아야 했다. 결국 많은 고려인이 연해주나 러시아, 혹은 모국인 한국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됐다.

▲ 고려인마을 내 공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광주 고려인마을

 

광주 월곡동이 고려인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10여년 전 부터다. 그보다 앞선 20여년 전부터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고려인들이 당시 광주 내에서 월세가 비교적 저렴했던 월곡동에 터를 잡게 됐다.

본지 기자가 직접 방문해 살펴본 광주 고려인마을은 전 세계 문화가 자연스럽게 한국에 녹아들어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거리에는 각국의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길을 거닐었고, 간판 역시도 각 나라의 언어로 적혀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중앙아시아 양식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마을 안에 있는 공원에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고려인의 뿌리가 한국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광주 고려인 마을은 지난 2001년 3~4가구가 정착한 것을 시작으로 이주한 고려인이 매년 증가, 2022년 12월 기준 구소련 국가 6곳에서 옮겨온 4712명(법무부 통계)의 고려인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고려인마을이 자체 파악한 인원은 이보다 많은 7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국내 지역 가운데 네 번째로 많은 숫자다.

▲ 고려인마을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서 벽화를 발견할 수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 안에는 어린이집을 비롯해 지역아동센터, 고려인 진료소, 광주에 정착한 고려인들을 위한 GBS고려방송 등 대한민국을 찾은 고려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기관과 시설이 마련돼 있다.

특히 고려인종합지원센터는 고려인의 입국부터 정착까지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돕는다. 일자리를 연계해 줄 뿐만 아니라 임금체불 상담과 법률 지원도 제공한다. 매주 목요일에는 지역 노인 100여명에게 식사도 제공하고 있다.

▲ 광주 고려인마을에 조성된 고려인 진료소. 고려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광주 고려인마을 주민관광청도 개소해 고려인마을을 관광지로 활성화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날 고려인마을 안내를 도와준 안연수 광주 고려인마을 해설사는 “마을 곳곳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형상물들이 조성돼 있다”면서 “현재 고려인들의 할아버지 세대는 직접 독립군 활동을 했거나 하다못해 군자금이라도 지원한 분들이 많다. 그렇기에 고려인들에게 홍범도 장군은 정신적인 지주와 같다”고 했다.

■고려인들의 대모

▲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

광주 고려인마을이 지금과 같이 안정화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조야 대표가 있다. 고려인인 신 대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조부는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신조야 대표도 강원도와 인연이 있다.

하지만 신 대표가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를 알았던 것은 아니다.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는 사실은 당시 소련 공산당 정부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에 대해 신조야 대표는 “말을 잘못하면 총으로 쏴서 죽이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이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이 컸는지 내가 ‘연해주에 살 때는 어땠었냐’고 물어봐도 화를 내며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그가 한국으로 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소련 붕괴가 있다.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며 촉발된 민족주의 운동의 여파로 소수인 고려인들은 차별받았고, 더 나아가 생존마저도 위협받아야 했다. 신조야 대표의 가족들도 집을 헐값에 넘기고 러시아로 적을 옮겨야 했다. 그러던 중 딸이 갑작스럽게 한국인과 결혼하게 되면서 신 대표도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우연한 계기로 들어오게 된 대한민국이었지만 그에게 있던 한민족의 DNA 덕분이었는지 신조야 대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국살이를 이어갔다. 신조야 대표는 “우즈베키스탄에 있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나와 다르게 생겼었다. 하지만 한국은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나랑 다 똑같이 생겼다”면서 “핏줄에 입맛이 각인된 것인지 나는 된장, 고추장, 쌈장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 음식이 맵쌀해야 맛있다”며 웃어 보였다.

▲ 광주 고려인마을은 건물 곳곳을 도색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려인마을 안에 있는 세탁소의 모습

■이제라도 한민족으로 품어야

신조야 대표에게는 아직 한가지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다. 그는 지난 2015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아직 많은 수의 고려인 동포들이 국적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신 대표는 “많은 고려인은 이미 원래 살던 나라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광주 고려인마을이 이들에게는 고향이다. 그런데 이들이 온전하게 계속 살아가려면 결국 국적이 필요하다. 이것만 인정해 주면 많은 고려인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서 “고려인의 뿌리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조선 땅을 떠났던 한 민족이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말을 한다. 고려인을 받아서 살 수 있게 해주면 소원이 없겠다”고 강조했다.

정민엽 기자 jmy4096@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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