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조선 초기 문화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이 공신 세력, 외가 세력, 처가 세력, 왕실 곁가지 등을 제거해 준 덕분이었다. 태종의 마스터플랜으로 완성된 강력한 왕권과 세종의 뛰어난 학문적 재능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릉 후면
세종은 승하 7년 전 자신이 죽으면 묻힐 자리인 수릉(壽陵)을 정한다. 수릉을 정할 때 조선 초 풍수가로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시기에 활동한 최양선은 이곳은 '곤방 물이 새 입처럼 갈라졌다.'[坤水分嘴] 하여, 그 해로움을 논하기를,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絶嗣損長子]고 하면서 반대를 한다. 연이어 많은 음양가(陰陽家)가 불길(不吉)하다며 반대한다. 하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 복지(福地)를 얻는 것이 선영(先塋) 곁에 장사하는 것만 하겠는가? 화복(禍福)의 설(說)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예종실록 4권, 예종 1년 1469년)며 부모님 헌릉 오른쪽으로 능지(陵地)를 결정하였다. 수릉 택지 3년 후에 소헌왕후 승하하자 논란 없이 장례를 마칠 수 있었고, 이어 4년 후인 1450년 6월 세종 승하 후 조선 최초 합장릉을 조성하였다. 풍수적으로 '절편손장자(絶嗣損長子)란 후손이 끊기고 맏아들을 잃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종 영릉 조성 후 14년간 세종의 장자 문종의 병사(1452년), 문종의 장자 단종의 폐위와 죽음(1457년),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요절(1457년), 예종의 장자 어린 인성대군의 죽음(1463년) 등 왕을 포함한 왕위를 계승할 장자 등 4명이 요절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왕실에서는 장자 절손의 원인인 영릉을 옮기게 된다.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 이어 두 번째로 능을 옮기는 천릉(遷陵)을 하게 된다.
영릉 향어로
세조는 세종 영릉 조성 후 장자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자 영릉(英陵)을 개장(改葬)할 것을 의논하게 한다. 세조에 이어 즉위한 예종은 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 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 서거정(徐居正) 등이 영릉(英陵)의 천장(遷葬)할 땅을 지금의 여주인 여흥(驪興)으로 복명(復命)하자 여흥을 천릉지로 윤허한다. 천릉 시 영릉을 파니, 현궁(玄宮)은 물기가 없고, 재궁(梓宮)과 복어(服御)가 새것과 같았다는 기록(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469년 2월 30일)으로 보아 영릉의 초장지는 재궁과 옷가지까지 섞지 않은 흉한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모산 자락은 너럭바위 투성이로 바위에는 습기가 있어 일종의 냉동고 현상으로 관과 수의 및 유해가 명태를 말리면 쪼그라드는 것처럼 썩지 않고 조성 당시 그대로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흉지였던 것이다.
영릉 무인석
세조 때부터 논의되다가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은 아버지 세조 장례 후 3개월 후 즉시 천릉을 하였다. 세종의 영릉이 천릉을 한 곳은 광주이씨의 선산이었다.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묫자리였다. 터를 양보해 달라는 강압에 가까운 예종의 부탁을 후손들이 거절할 수가 없어서 양보한 것이다. 일종의 강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는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힌다. 일설에는 세종 같은 성인(聖人)을 이러한 대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영릉 정자각(궁능유적본부)
영릉은 내룡맥이 북성산에서 내려와 왕릉 뒤에서 회전하여 다시 북성산을 향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왕릉이다. 회룡고조란 산의 지맥이 360도 돌아서 자신이 출발한 조산(祖山)을 돌아보고 혈을 맺은 것으로 산의 기운이 매우 왕성하다. 청룡은 물을 거수하며 왕릉 앞까지 길게 진행하여 지각을 내밀고 능에 기(氣)를 공급한다. 백호도 지각을 내밀어 본신룡 앞까지 진행하여 능을 잘 감싸고 있다. 안산은 북성산의 기운을 받아 조응하면서 능에 강한 기운을 공급하고 있다. 혈장은 청룡 선익과 백호 선익을 갖추고, 전순은 안산의 기운을 받아드릴 정도로 강한 혈을 만들었다. 영릉은 안산, 청룡, 백호, 수세, 혈장 등을 훌륭히 갖춘 능이다.
헌릉 편에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태종이 직접 터를 잡은 대모산 자락의 헌릉 터는 후에 '헌릉 단맥(斷脈)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오랜 논쟁 끝에 세조 때 지맥 단절과 민생 편의의 두 문제점을 고갯길에 잔돌을 까는 비보를 통해 동시에 해결되었지만, 애민정신을 대표하는 세종은 왕릉의 산기운이 끊어지지 않게 지름길인 고갯길 출입을 금지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출입 금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논쟁을 유도하였다. 백성들의 편리함보다 왕실의 풍수 발복을 우선하는 세종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