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잎클로버 고백, 저지름의 미학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겨레 2025. 5. 11. 15: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돌이켜보면 참 민망스러운 짓을 많이도 했다. 고1 크리스마스이브 때였다.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작은 화분에 심은 네잎클로버를 선물하며 고백 비슷하게 했다가 대차게 차였다. 그때 쪽지에 짧은 문장을 써넣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네가 소녀에서 숙녀로 변하는 동안 네 잎의 조그만 풀이 행운을 안겨주길.” 이 한줄의 문구를 쓰기 위해 수많은 시집을 펼쳐봤고 문학소년이었던 친구와 머리를 맞댔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걸맞은 이 문장을 나는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미안해”라는 단답형 거절에 뜨거운 물을 얼굴에 들이부은 것 같은 체감온도 38.5도의 화끈거림을 느꼈던 것까지 정확하게 기억난다. 거절당할지라도 고백조차 못 한다면 평생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 사랑에 실패할지언정 고백에 실패하지는 말자. 1할도 안 되는 타자라도 메이저리그급 강속구 투수의 공에 얼어붙지 않고 헛스윙이라도 휘둘러 봤으니 후회는 없다. 그때부터 돈키호테처럼 망설이지 않고 일단 부딪치고 저질러 보는 생활이 시작된 것 같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핑크빛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그때 읽었던 시들의 떨림은 아직도 연둣빛으로 싱싱하게 남아있다. 그때의 고백이 나비효과처럼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되었고, 글을 쓰다 보니 칼럼니스트까지 되어 마감의 고통을 시시포스처럼 느끼고 있다.

저지름의 미학. 어느 정도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시도를 선택한다면 청춘이다. 익숙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시도했을 때 실패할 확률이 높다. 어쩌면 실패를 많이 한 사람들은 그만큼 새로운 것에 도전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방증일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른살이 훌쩍 넘어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져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고, 복싱 만화를 보고 멋있어 보여서 체육관에 찾아갔다가, 프로 테스트까지 나갔다. 물론 2라운드 동안 처맞고 돌아와 이후로는 얌전히 샌드백만 두드리기로 했지만. 오토바이 면허도 따고, 일어학원도 다니고,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 봤는데, 사실 제대로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면 뭐 어떤가! 그로 인해 삶이 재미있고 지루할 틈이 없다.

이렇게 뭐든 시도해 보는 것은 인디뮤지션으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올해가 크라잉넛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크라잉넛 멤버들은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녹음, 믹싱은 물론 기획, 홍보, 굿즈 제작, 앨범 디자인까지 직접 해 오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지금 이 칼럼의 삽화도 크라잉넛의 기타리스트 상면이가 그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곡 ‘허름한 술집’의 뮤직비디오 연출과 편집을 직접 시도해 보기로 했다. 주어진 예산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홍대의 단골 문화공간인 ‘제비다방’에 장소 협조를 구했다. 처음엔 예산을 아끼고자 곡의 흐름에 어울리는 스틸 사진에 가사를 입히는 형식으로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촬영 일주일 전 샤워를 하다가 문득 사진 사이를 영상으로 이어 붙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흘 전 소품을 주문하고, 이틀 전에 카메오 출연할 친구 12명을 섭외하고, 하루 전에 자주 가던 엘피바에서 팝콘 그릇을 빌려왔다. 비싼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로 했다. 예산이 부족한 자리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메꾼다.

조명 없이 자연광만으로 찍다 보니 날씨가 흐려 세시간 안에 촬영을 마무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구형 스마트폰을 이용해 흑백의 레트로한 느낌을 살렸고, 편집 시간을 절약할 겸 처음 48초는 원테이크로 촬영했다. 메이킹 촬영을 도와주려고 온 배우 헤이든 원이 재작년에 스마트폰 영화제에서 대상 탔다는 얘기를 하길래, 그 자리에서 바로 촬영감독이 되었다. 평소 밥과 술을 자주 사주었기 때문에 흔쾌히 나와준 밴드 극동아시아타이거즈, 차세대, 라이엇키즈 멤버들도 즐겁게 촬영에 임해 주었다. 그렇게 해가 지기 바로 직전, 2시간45분 만에 촬영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이번에도 후회 없이 시도는 해 봤다. 적어도 돌아갈 수 없는 나날들의 기록을 아쉬움으로 채워 넣지는 않았다.

눈이 펑펑 오던 겨울날 많은 친구들이 네잎클로버 찾는 걸 도와줬는데 그중 크라잉넛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짜는 아니었고 매점에서 빵을 사줬거나 오락실에서 오락을 몇판 시켜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그 여학생과 웃으며 그때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네잎클로버 선물을 받아서 기분은 좋았다고 했다. 그거면 됐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