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 피 흘리며 쓰러진 여성, 지켜보는 사람들...비극적 장면 연출해낸 비극의 장인 [슬기로운 미술여행]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5. 5. 1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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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미술여행 - 21] 체코 국립 프라하 미술관

체코 프라하는 처음이었습니다. 뾰족뾰족한 고딕 첨탑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무척 예스러운 도시였죠. 체코의 사암으로 만든 벽돌은 시간이 지나면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게 변합니다. 대성당은 물론이고, 온 도시의 건물이 검정색 일색이었습니다. 덕분의 헐벗은 나뭇가지와 카를교의 조각상, 도시의 건축물이 잘 어울렸습니다. 가을이 제철이라는 프라하는 겨울도 제법 근사하게 보였습니다.

뒤러의 그림에서 시작된 황제의 컬렉션
프라하성 입구와 나란히 있는 왼쪽의 슈테른베르크 궁전은 국립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김슬기
건물들은 하나같이 동화속에서 나온 것처럼 환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이 도시의 미술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아무래도 저에게 체코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국부로 존경받는 도시이자,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를 배출한 예술의 나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프라하는 미술관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국립 미술관(NGP)을 검색하면 많은 미술관이 검색됩니다. 도시의 크고 작은 궁전을 비롯해 6개의 공간을 국립 미술관으로 쓰는 네트워크 미술관 구조로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언덕 위에 있는 프라하성 주변에 밀집해 있습니다.

고전 걸작 컬렉션(Old Masters)은 보헤미아의 성 아그네스 수녀원(Convent of St Agnes of Bohemia), 슈바르첸베르크 궁전(Schwarzenberg Palace), 슈테른베르크 궁전(Sternberg Palace)에서 상설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슈테른베르크 궁전에는 중요한 작품이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묵주 기도 성모의 축일(Feast of the Rose Garlands)>(1506)입니다.

Albrecht Dürer [Feast of the Rose Garlands], 1506 ©National Gallery Prague
1505년 여름, 뉘른베르크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34세의 젊은 예술가는 고향을 떠나 두 번째로 베니스에 체류했고 이 때 완성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큰 명성을 얻으면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미술사학자 야로슬라프 페시나는 “아마도 독일의 거장이 그린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일 것”이라고 상찬하기도 했습니다.

성모의 품에 누운 예수가 막시밀리안 1세 황제와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축복하고 있는 작품의 오른쪽 나무 아래에는 그의 상징과 같은 유명한 자화상이 숨어 있습니다. 뒤러는 손에 종이를 들고 있는데요. 유명한 서명과 함께 “5개월만에 완성했다”는 라틴어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그는 자존감이 정말 대단한 천재화가였습니다.

프라하 국립 미술관의 공식적인 시작은 예술애국회가 창설되고 미술 아카데미와 회화 갤러리(Picture Gallery)가 문을 연 1796년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NGP 컬렉션의 시작은 17세기 초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606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장미 화환의 축제>를 루돌프 2세(Rudolf II)가 구매하면서 왕실 컬렉션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NGP 올드 마스터 컬렉션은 명작들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아뇰로 브론지노, 엘 그레코, 뒤러, 렘브란트 등 거장들의 작품을 골고루 소장하고 있습니다.

1902년에는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의 주도로 보헤미아 왕국의 현대 미술관이 설립됩니다. 이 기관을 통해 19~20세기 현대 미술 컬렉션이 수집되었고, 이 컬렉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무역 박람회 궁전(NGP–Trade Fair Palace)입니다. 구시가 광장에 있는 작은 크기의 킨스키 궁전(Kinský Palace)은 NGP가 자랑하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40만 점 이상의 판화, 드로잉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에곤 쉴레의 탁월한 걸작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1917)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gon Schiele [The Seated Woman With Bent Knees], 1917 ©National Gallery Prague
체코 미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미술관
거대한 오피스 건물처럼 보이는 프라하 국립 미술관의 무역 박람회 궁전. ©김슬기
로비에서는 7층까지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와 함께 탁 트인 전시 공간이 한 눈에 보인다. 사진은 조각이 전시된 개방형 전시장. ©김슬기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들이 프라하에서 단 한 곳의 미술관을 찾는다면 무역 박람회 궁전이 최선입니다. 블타바강 북쪽에 자리 잡은 오피스 빌딩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현대식 건물은 과거 화재가 난 무역 박람회 건물을 재건하면서 미술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체코의 근대미술관과 동시대 미술관은 물론이고 조각, 건축, 디자인미술관을 한 곳에 모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간입니다.

채광이 좋은 널찍한 공간을 사용하고 음식과 맥주도 맛이 있는 미술관 카페는 힙스터들로 가득했습니다. 건물의 유래대로 박람회를 찾은 것처럼 많은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어, 반나절을 꼬박 돌아도 시간이 부족할 만큼 넓은 미술관이었습니다.

체코의 미술은 이름을 아는 작가가 거의 없어서 무첫 낯설었습니다. 그럼에도 빈에서도 만났던 동유럽 특유의 특징이 녹아 있는 화풍은 익숙한 면도 있었습니다. 빈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대표작을 여러점 소유하고 있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반 고흐, 르누아르 등 인상파 작품을 비롯한 19세기말 유럽 걸작을 방대한 분량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인데요. 그 비결은 1923년 체코 슬로바키아 정부가 프랑스 미술 컬렉션을 대거 구입한 덕분이었습니다.

Luděk Marold [The Egg Market in Prague], 1888 ©National Gallery Prague
저는 꼭대기층에서 근대 미술 컬렉션부터 만났습니다. <1796–1918: Art of the Long Century>를 주제로 열리는 상설전시는 150명의 450점에 달하는 작품을 전시하는 거대한 전시입니다. 미술관은 “체코와 국제 예술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는 목적으로 파블로 피카소 옆의 요제프 만스(Josef Mánes), 보후밀 쿠비슈타(Bohumil Kubišta) 옆의 요제프 나브라틸 (Josef Navrátil), 프란츠 폰 슈턱(Franz von Stuck) 옆의 안토니오 카노바 (Antonio Canova)와 같이 체코와 유럽의 예술가를 나란히 소개하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자화상, 인물화, 활기찬 도시 풍경화, 종교와 신화 주제의 예술까지 다채로운 주제를 넘나듭니다. 체코의 근대를 눈앞에서 만날 수 있는 정말 즐거운 전시였습니다. 프라하성과 카를교를 그린 풍경화부터, 산업화가 시작되는 도시의 면면을 만나는 그림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를 거친 국가들은 사실주의 회화의 전통이 탁월했었다는 걸 매번 느끼곤 합니다. 루덱 마놀드(Luděk Marold)의 <프라하의 달걀 시장(The Egg Market in Prague)>(1888)은 19세기 말 프라하의 장터가 눈에 잡힐 듯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시 당시 이 그림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립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19세기 프라하의 비극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
Jakub Schikaneder [Murder in the House], 1890 ©National Gallery Prague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19세기 말의 또 다른 사실주의 회화 야쿱 쉬카네더(Jakub Schikaneder)의 <집 안의 살인(Murder in the House)>(1890)이었습니다. 시카네더는 ‘비극의 장인’입니다. 어린 소녀들의 비극적인 삶을 여러 차례 변주해 그렸습니다. 존 에버렛 밀레의 <오필리아>의 영향을 받았죠.

프라하 유대인 지구에서 한 젊은 여성이 살해된 후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열 명 가량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표정과 반응을 보이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산업화의 물결이 휩쓸고 간 도시는 하층민에게 빈곤과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림 속에서 돌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소녀를 보며 이웃들은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높이 2미터, 길이 3미터가 넘는 이 대작을 통해 화가는 가장 낮은 계층의 이야기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낸 겁니다.

작품이 공개됐을 때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모여 피해자의 죽음 원인과 범인의 정체에 대해 활발히 토론했다고 합니다. 단순한 그림을 넘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던 거죠. 그림 한 점이 죽음과 공동체, 폭력의 여파를 깊이 탐구할 수 있음을 증명한 걸작입니다.

쉬카네더는 사후에 작품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체코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습니다. 1998년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가 화제를 모으면서 재발견됐죠. 2021년 런던 소더비에서 판매된 <프라하의 겨울(Winter in Prague)>은 그의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로 그려진 프라하의 풍경화로, 58만달러의 기록적인 가격에 낙찰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1세기에 뒤늦게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 셈입니다.

František Kupka [Amorpha, Fugue in Two Colours], 1912 ©National Gallery Prague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Amorpha: Fugue in Two Colours>는 이 미술관의 간판 작품입니다. 딸이 가지고 노는 공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두 가지 색상으로 추상적인 움직임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바흐의 음악 푸가(fugue)가 그림을 통해 마법처럼 표현된 오르피즘의 대표작품입니다. 1912년 파리의 가을 살롱에서 대중에게 공개 된 최초의 추상 회화로 기록된 작품이기도 하죠.

체코에는 요제프 만네스(Josef Mánes), 베네시 크뉘퍼(Beneš Knüpfer), 막스 슈바빈스키(Max Švabinský) 등 정말 재능이 넘치는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비롯해, 신화적 상상력을 영국의 라파엘전파보다도 더 화려한 장식적인 표현으로 그렸던 막스 피르너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근대 미술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Virgin>(1913)이었습니다. 꿈꾸는 처녀의 생의 주기를 상징하는 여섯 여인이 한 송이 꽃다발처럼 얽혀 있는 관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전후 미술을 전시하는 층에서는 공산국가 시절의 프로파간다 미술부터 ‘프라하의 봄’ 이후에 만개한 현대 미술로의 전환기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체코 미술사에서는 초현실주의와 사실주의가 대결했고, 서정적 추상화가 구성주의와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개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퍼포먼스, 설치 등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술관을 체코를 대표하는 동시대 작가의 특별전도 계절마다 부지런히 열고 있는 미술관이었습니다.

Max Pirner [The End of All Things - Finis], 1887 ©National Gallery Prague
Gustav Klimt [Virgin], 1913 ©National Gallery Prague
알폰스 무하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는 성비투스 성당
성비투스 대성당 ©김슬기
체코를 대표하는 국민 화가는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입니다. 장식적인 아르누보풍 그림으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죠 알폰스 무하 미술관보다도 무하의 가장 감동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성비투스 대성당입니다.

성비투스 대성당은 프라하를 찾는 모든 여행자들이 찾는 프라하 건축 최고의 걸작이죠. 특히 각기 다른 장인들이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합니다. 해가 높이 솟은 시간에 성당에 들어서면, 싸늘한 실내 공기에도 스테인드글라스로 스며드는 빛이 만드는 장엄한 모습은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만듭니다.

알폰스 무하의 스테인드 글라스 ©김슬기
무하의 작품은 대성당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 입구의 작은 예배당에서 곧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포스터 등을 만드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뒤, 고국으로 돌아온 무하는 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슬라브 대서사’를 완성하며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는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이 시기인 1930년대 초반 작업을 병행했던 게 스테인드 글라스입니다.

863년 기독교 전파를 위해 비잔틴에서 대모라비아 왕국을 방문한 키릴루스와 메토데이우 형제의 생애를 묘사했습니다. 프라하성을 세운 국왕 보르지보 1세의 세례장면을 비롯 성바츨라프와 그의 할머니인 루드밀라 등을 새겨넣었습니다. 애국심에 불탔던 만년의 예술가가 보헤미아의 유리 공예 장인들이 만들어낸 걸작입니다. 그 어떤 대성당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알폰스 무하를 재발견하게 만들었습니다.


런던에 살면서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를 찾아가 미술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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