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소달구지에 실려 온 조선 최초의 피아노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5. 5.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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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에비슨 1893년12월 제물포 통해 서울에 들여와
1893년 12월 제물포항에 도착한 선교사 에비슨의 피아노는 소달구지에 실려 서울까지 왔다. 50킬로미터나 되는 여정이었다. 피아노는 에비슨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가족들은 피아노 주위에 모여 우렁차게 찬송가를 불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893년 12월 선교사 에비슨(1860~1956)의 이삿짐이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살림살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피아노였다. 철로가 놓이기 전이라 옮길 방법이 마땅치않았다. 황소가 끄는 달구지에 피아노와 가재도구를 싣고 50㎞ 남짓한 산길을 돌아 서울에 도착했다.

‘아내는 아마도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것 중의 하나인 피아노를 특히 걱정했다. 기차, 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소 수레로 운반하는 도중에 많은 사고가 일어났을 수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한 이삿짐 중에서 가장 먼저 피아노 상자를 열었다. 아내는 건반을 시험해보았다. 모든 음색은 완벽했다.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녀가 친 첫 선율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었다. 우리는 피아노 주위에 모두 모여 찬송가를 환희에 넘쳐 불렀다.’(‘올리버 R 에비슨이 지켜본 근대 한국 42년 1893~1935’ 171쪽)

에비슨은 피아노가 도착한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피아노의 ‘서울 입성’을 구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1893년 서울에 선교사로 온 올리버 에비슨. 그의 이삿짐중엔 피아노가 포함됐다. 에비슨은 제중원을 운영하다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병원의학교를 세웠고, 1917년 연희전문학교 설립 때부터 교장을 맡아 1934년까지 재직했다./퍼블릭 도메인

◇딸 레라 에비슨, 정신여학교 음악 지도

캐나다 출신인 에비슨은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로부터 선교 제안을 받고 조선으로 왔다. 토론토대 의대 교수까지 박차고 나왔다. 1893년 7월16일 부산에 상륙한 에비슨 가족은 만삭의 아내와 여섯살, 네살, 두살 아기까지 다섯 식구였다.

에비슨은 알렌에 이어 제중원을 맡았다. 이어 세브란스 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를 세우고 1908년 조선인 최초의 의사 7명을 배출하는 등 의학교육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된 1917년부터 1934년까지 교장을 맡아 근대 대학교육에 공헌했다.

◇알렌 아내, 궁내부 대신 앞서 오르간 연주

에비슨의 피아노는 그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에 올 당시 네살이었던 그의 딸 레라 에비슨은 이 피아노로 음악을 배워 정신여학교에서 정규 음악수업을 담당하고 학생들의 개인지도를 맡을 만큼 실력을 닦았다.

구한말 알렌을 비롯, 헐버트, 메리 스크랜튼, 모펫 등 서울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은 소형 오르간을 비롯한 악기를 갖고 있었다. 알렌은 1885년4월3일자 일기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궁내부 대신을 위해 아내 프란시스가 오르간을, 자신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고 기록했다. 서양 음악의 도입은 이처럼 선교사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보담 목사 부부. 부인 에피 엘든 브라이스는 교회 피아니스트였다. 사보담 목사는 1899년11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에 파견됐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피아노를 들여온 주인공이다./부산박물관

◇장정 20여명이 가마로 운반한 피아노

피아노의 상륙을 증언한 기록은 또 있다. 1899년11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에 온 사이드보텀(Sidebotham, 1874~1908) 부부다. ‘사보담’(史保淡)이란 우리말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사보담의 이삿짐은 1900년 3월26일 낙동강변 사문진나루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뱃길로 왔다. 대구 중구의 종로의 집까지 옮길 방법이 마땅찮았다.

사보담은 장정 20여명을 고용했다. 짚단을 사서 짐꾼들과 함께 굵기 5센티미터, 길이 15미터의 밧줄 3개를 만들었다. 대구에서 가져온 4.2 미터 길이의 상여용 막대 2개를 피아노 양옆에 대고 밧줄로 연결한 뒤 피아노를 땅에서 30센티미터 높이로 들어올렸다.

사보담 선교사 부인 에피가 그린 스케치. 피아노 운반 도구를 그렸다. 사문진 나루터에서 대구 시내 종로의 집까지 장정 20여명이 2박3일간 달라붙어 날랐다. 16킬로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부산박물관

다음날 피아노를 가마에 싣고 16킬로미터를 이동했다. 중간에 하룻밤 자는 바람에 2박3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한옥 집 문이 피아노보다 6센티미터 좁았다. 문을 부숴 넓힌 뒤에야 피아노를 집안에 들일 수있었다. (손태룡, 한국의 피아노 유입과정 고찰: 사보담 및 에피의 피아노, 음악문헌학 제4집, 2013)

피아노 주인은 사보담 아내인 에피 앨든 브라이스(Effie Alden Bryce,1876~1942)였다. 에피는 미국에서 교회 피아노, 오르간 반주를 맡으면서 동네에서 음악교실을 운영했다. 사보담은 1900년 11월 부산으로 임지를 옮겼다. 피아노도 물론 부부를 따라 갔다.

◇‘스위트홈’ 필수품

이렇게 들어온지 20년만에 피아노는 한국인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스물일곱살 작가 민태원이 1921년 문예지 ‘폐허’에 발표한 소설 ‘음악회’엔 피아노가 등장한다.

여주인공 숙정이 동경 유학생과의 만남을 앞두고 행복한 결혼을 상상하는 장면이다. ‘비단 옷, 시체(時體·신식) 양복, 금강석 반지, 자동차 탄 젊은 내외, 양옥집, 앞뒤로 둘린 정원,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피아노는 모던 걸이 꿈꾸는 ‘스위트홈’ 필수품이었다.

조선일보 1931년 6월24일자에 실린 안석영 만문만화 '락타가 바눌구멍으로'. 비좁은 대문을 헐고라도 피아노를 월부로 들여놓는 모던 부부의 허세를 꼬집었다.

◇‘문화생활하면 피아노쯤은…’

1929년 9월 월간지 ‘별건곤’은 경성의 이색지구를 소개하면서 ‘문화촌’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文化村이라면 소위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 문화생활이라면 松板쪽을 붙여놓았더라도 집은 신식 양옥으로 지어 놓고 피아노에 맞춰 흐르는 독창 소리가 아니면 유성기판의 재즈밴드 소리쯤은 들려 나와야 하고...’ 피아노정도는 집에 있어야 문화인 취급을 받는다는 얘기다.

◇샐러리맨 연봉 값 피아노 월부로 들여

이 때문에 월급쟁이 1년치 연봉과 맞먹는 피아노를 월부로 들여놓는 모던 부부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요사이 전황바람에 몇곱씩 남겨먹던 ‘피아노’를 월세로 주는 데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지 바늘 구멍만한 대문으로 피아노를 몰아넣다가 ‘스피ㅡ드’내외가 대문을 헐고서 끌어들이는 피아노광(狂)이 있다. 천당도 헐고 들어가면 지구덩이째 들어갈 수있을 듯ㅡ’(조선일보 1931년 6월24일 ‘락타가 바눌 구멍으로’1)

피아노, 나아가 서양 음악을 빨리 따라잡아야 할 서구 근대 상징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참고자료

민태원, 음악회, ‘폐허’2호,1921년

김사랑,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다성적 음악공간의 형성,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손태룡, 한국의 피아노 유입과정 고찰: 사보담 및 에피의 피아노, 음악문헌학 제4집, 2013

올리버 R 에비슨, 박형우 편역, 올리버 R 에비슨이 지켜본 근대 한국 42년 1893~1935, 청년의사, 2010

박형우, 올리버 R 에비슨의 생애, 연세의사학, 제13권 제1호, 20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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