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선율 타고 흐르는 사랑과 슬픔, 그 격정의 몸짓

유주현 2025. 5. 10.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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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국립발레단 ‘카멜리아 레이디’
11일까지 공연되는 국립발레단 신작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을 춤추는 조연재(오른쪽)와 변성완. [사진 국립발레단]
폐병에 걸린 창백한 낯빛으로 작가 뒤마 피스, 작곡가 리스트 등을 홀렸던 19세기 파리의 레전드 팜므파탈이 왔다. 23세로 요절한 고급 창녀 마리 뒤플레시스는 뒤마 피스의 자전적 소설 ‘춘희’ 속 마르그리트로 영원히 살고 있다. 국립발레단이 아시아 초연 중인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1978)가 그녀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로 곧잘 만나지만, 국내서 발레로 만나는 건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현역시절인 2012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내한공연 이후 처음이다.
마르그리트로 브누아 드라 당스를 받았던 강 단장은 취임 이후 줄곧 이 만남을 지상과제 삼아왔지만 “공연권 따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고 했다. 독일 함부르크발레단을 50년 넘게 이끈 거장 노이마이어가 쉽게 공연을 허락하지 않아서다. 국립발레단에도 지난해 초연한 ‘인어공주’로 먼저 무용수들을 면밀히 파악한 후 공연을 결정했다는데, ‘카멜리아 레이디’는 뭐가 그렇게 특별할까.
카멜리아 레이디 [사진 국립발레단]

무대를 보고나니 과연 그럴만하다. 존 크랑코의 ‘오네긴’,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미니시리즈라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는 대하드라마랄까, 급이 다른 ‘드라마 발레의 끝판왕’이다. 텍스트의 미학인 소설 원작을 무대화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죽하면 ‘오페라적 세계관’ ‘발레적 세계관’이란 말이 있다. 뚜렷한 개연성 없이 갑자기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배신에 슬퍼하다 최후를 맞는다는 뼈대만 갖춰놓고 대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다면 그뿐이다.
카멜리아 레이디 [사진 국립발레단]

그런데 ‘카멜리아 레이디’는 180분 동안 만남에서 이별까지 사랑의 모든 디테일을 욕심껏 담아낸다. 노이마이어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 소설 속 아르망이 마르그리트에게 책으로 건네는 ‘마농 레스코’를 극중극으로 활용한 현실과 환상의 오버랩 등으로 한편의 무성영화 같은 무대를 빚어냈다.

32회전 푸에테를 품은 클래식발레의 그랑파드되는 없지만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마농과 데그리외, 가스통과 프뤼당스 세 커플의 다양한 파드되의 향연에 관객은 지루할 틈 없다. 발레의 전형적인 동작이나 마임도 없다. 모든 움직임에 감정을 입혀 세련되게 변형시킨 고난도 테크닉으로 점철되니 무용수에게는 ‘인어공주’보다도 강도가 몇배 높은 강철 체력과 치밀한 연기력까지 요구한다. 강 단장은 자신의 ‘카멜리아 레이디’ 마지막 파트너였던 마레인 레드마커와 함께 직접 시연을 보이며 지도에 나섰고, 노이마이어는 85세의 노구에도 밤 11시까지 리허설을 직접 챙기며 프로덕션 완성도를 꼼꼼히 체크했다고 한다.

카멜리아 레이디 [사진 국립발레단]
같은 원작이라도 경쾌하고 떠들썩한 ‘축배의 노래’로 기억되는 베르디 오페라의 웅장한 비극과는 결이 다르다. 쇼팽의 피아노 음악 중심으로 끊임없이 깊숙한 감성을 건드리는 발레는 지극한 슬픔의 서정시다. 병든 창녀 마르그리트를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귀족 청년 아르망의 고백은 뒤마 피스 자신의 슬픈 내면이지만, 병약했고 부모의 압박에 사랑을 잃었으며 쓸쓸히 죽음을 향했던 쇼팽의 음악과도 절묘하게 동기화된다. 서정과 격정을 오가는 감성적 노래들을 스토리라인에 섬세하게 배열하고 정교한 신체 언어로 펼쳐낸 ‘쇼팽의 사랑과 슬픔의 춤’에 ‘현존 최고 안무가’의 위엄이 깃든다.

수미상관으로 막을 여닫는 소나타 3번 3악장 ‘라르고’가 쇼팽이 조르주 상드와 잠시 행복했던 창작의 절정기에 쓴 곡이라니 왠지 더 슬픈 구성이다. 마르그리트의 드레스 색의 변화에 따라 각각 퍼플·화이트·블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3개의 파드되가 슬픔의 삼각형을 그린다. 10분간 밀당만 하는 퍼플 파드되에 협주곡 2번 2악장이 흐를 때 첫사랑 콘스탄차를 향한 쇼팽의 설렘이 중첩된다. ‘찐 사랑’을 인증하는 화이트 파드되에 다시 흐르는 소나타 3번은 쇼팽의 가장 서정적인 노래다. 재회 장면인 블랙 파드되에서 미련과 갈등이 격정으로 치닫는 복잡한 심경을 노래하는 발라드 1번에는 폴란드 혁명 실패로 조국을 떠난 쇼팽의 불안과 그리움, 고독의 정서가 묻어난다. 첫사랑에 대한 쇼팽의 쓸쓸한 고백인 협주곡 1번 2악장은 마르그리트가 마농 커플과 마지막 3인무를 출 때 사무치게 흐른다.

카멜리아 레이디 [사진 국립발레단]
이쯤되면 음악과 서사, 안무가 삼위일체의 경지다. 추상의 음악이 이토록 선명한 구상화가 되다니, 쇼팽도 브라보를 외쳤을 터다. 알레그로로 질주하는 건반의 속도를 따라잡는 고난도 안무 열전에 조연재·한나래·변성완·곽동현 등 주역 무용수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지만, 더없이 주옥같은 선율에 호흡할 수 있는 무대가 행복해 보인다. 무엇보다 토종 무용수들의 역량이 이 정도다 싶다. 아시아 초연의 큰 뜻이 여기에 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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