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와 꽃게
[박준의 마음 쓰기] (27)
아버지는 평생 지갑이 없었다. 일과 관련된 거래처나 그리운 이들의 전화번호를 적은 작은 수첩 하나만을 늘 지녔을 뿐이다. 수첩 앞뒤에는 신분증과 교통 카드, 비상금 약간만을 넣고 다녔다. 자기만의 물건을 사는 법도 없었고 먹고 싶은 음식을 찾아 즐기는 취향도 없었다. 밥은 일하는 현장과 연계된 식당이나 집에서만 먹었다. 그렇다고 구두쇠 소리를 듣고 살지는 않은 듯하다. 누군가와 만나 어울리는 일을 즐기지 않았던 탓이다. 자연스레 아버지는 세상에서, 그리고 세상이 정한 물가와 재화의 가치에서 조금 비켜나 있었다.
어릴 적 장난감 기차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이 있다. 일자로 뻗은 선로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구불구불 길이 이어지고 그 끝에서 다시 돌아 이어지는, 건전지 힘으로 달리는 기차 장난감. 그것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심심하지 않게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선로를 따라가면 멀고 환한 상상의 장소에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 창신동의 장난감 거리로 향한 기억. 하지만 그날 나는 결국 장난감 기차를 갖지 못했다. 아마 아버지가 가늠한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 물건이었으리라. 지금도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장난감 기차를 보면 순간 흠칫한다. 물론 장난감 기차는 이제 내게 비싼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지 않는다. 가지고 싶은 걸 모두 가질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이다.
아버지와 보낸 시간 속에서 언젠가부터 지출은 내 몫이 됐다. 문제는 다툼이 종종 생겼다는 것. 장소는 주로 식당이었다. 설렁탕집에 가면 아버지는 기본 설렁탕을 시켰다. 고기와 고명을 더 얹은 특설렁탕을 무용하게 생각했고 수육 같은 곁들이 음식을 사치로 여겼다. 함께하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내놓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매번 모르거나 모르는 체했다.
몇 해 전 일이다. 꽃게가 먹고 싶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탕보다는 찜이 더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순간 당황스럽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는 특별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일부러 찾아 먹는 음식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특정 메뉴를 콕 집어 먹고 싶다 했으니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격이었다.
부랴부랴 동네 근처 꽃게찜을 전문으로 하는 집을 찾았다. 가는 동안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꽃게찜이 얼마나 할 것 같냐고. 아버지는 2만원쯤 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날 아버지는 꽃게를 참 맛나게 드셨다. 하지만 꽃게를 두어 마리 더 주문하려는 나를 언제나처럼 막아 세웠다. 맛을 봤으니 이제 됐다는 것이다. 꽃게로 배를 채우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꽃게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꽃게 먹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게다가 사나운 집게발까지 살뜰하게 발라 먹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실소를 터뜨렸지만 어쩐지 아버지 마음이 잘 이해되었다. 취할 수 있다고 해서 다 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여전히 내가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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