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두마차 경기장 3만 군중 살육, 동로마판 F1 경주의 비극

2025. 5. 1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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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라벤나는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에 있다. 로마 기독교의 유산으로 충만한 도시다. 비잔틴 제국 시대의 교회 건축물이 많다. 산 비탈레 성당은 그 중에도 보석처럼 빛난다. 547년 막시미아누스 대주교 시대에 헌당되었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과 비슷한 구조다.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튀르크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면서 모자이크 작품을 모두 가렸다. 모자이크 벽화는 비잔틴 미술의 특징 중 하나다. 산 비탈레 성당은 당대의 모자이크 작품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하이라이트는 성당 벽을 장식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모자이크다.

로마 제국처럼 ‘ 빵과 서커스’ 정책 계속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에 있는 비잔틴 제국 시대의 교회 건축물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작품.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와 황후 테오도라의 모습을 남겼다. [사진 위키피디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서기 527년부터 565년까지 재위하며 비잔틴 제국의 강역을 넓히고 제도를 개혁해 1453년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역사에 주춧돌을 놓았다. 모자이크 속 황제는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든 모습이다. 제국의 관리와 군인, 성직자들을 거느리고 예물을 바치고 있다. 작가는 황제의 모습을 형상화해 나가면서, 신이나 성인을 표시하는 후광을 장식했다. 황제의 눈빛을 보라. 절대자를 향한 순명이 아니라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과 굳은 의지가 이글거린다. 백성들을 굽어보며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그는 성직자들의 생활과 도덕에 관심을 기울였고, 극장과 경기장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의 전통인 4두마차 경주는 비잔틴 제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에는 10만 명을 수용하는 마차 경주장 히포드롬(Hippodrome)이 있었다.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았다. 성 소피아 성당을 마주보는 블루 모스크 건너편, 지금은 광장이다. 그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1500년 전 돌멩이 하나 남김없이 피로 물들인 참극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다른 이름은 동로마 제국이다. 동로마인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로마의 눈부신 문화를 물려받은 기독교 국가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비잔틴 제국이 이은 로마의 정책 가운데 ‘빵과 서커스’가 있다. 시인 유베날리스가 로마의 세태를 풍자한 표현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놀이를 만들어 몰두하게 만들면 국민들은 세상일(특히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우민정책(愚民政策)이다. 제5공화국 군사정권이 선택한 ‘3S정책’과 흡사하다. 3S는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다.

콜로세움에서 열린 검투사 경기는 로마 서커스의 상징이다. 히포드롬은 비잔틴 제국의 콜로세움이다. 여기서 열리는 4두마차 경주의 인기는 엄청났다. 경기가 열릴 때마다 구름관중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지금으로 치면 클럽이나 구단과 같은, 경주 연합체가 나타났는데 청색 팀(Venetii)과 녹색 팀(Prasinoi)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청색과 녹색으로 나뉘어 응원 대결을 했다. 4두마차와 마차를 모는 기사들도 팀 색깔에 맞춰 옷을 입었다.

청색 팀의 주축은 지주와 그리스-로마계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전통 기독교인들이었다. 녹색 팀은 상인, 기술자 등 중간 계층이 주축을 이뤘다. 응원전은 파벌싸움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경기가 논쟁거리였지만 나중에는 정치가 끼어들었다. 청색 팀과 녹색 팀은 거대한 정치 집단으로 변해갔다.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정당과 다름없었다. 조직을 이루고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사병(私兵)까지 거느렸다. 그리고 충돌했다. 서기 493년, 501년, 511년…. 그러나 532년에 벌어진 참사보다 더 끔찍한 사례는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청색 세력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녹색과 청색 세력을 모두 억눌렀다. 532년 1월 10일 4두마차 경기가 열렸을 때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시기였다. 경기가 끝난 뒤 청색 팀과 녹색 팀이 충돌했다. 황제는 군대를 투입했고 양측의 지도자를 처형하거나 감금했다. 두 파벌은 하나가 되어 분노했다. 사흘 뒤 경기가 다시 열리자 군중은 황제를 향해 승리를 의미하는 ‘니카!’를 외쳤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황제는 피신했다. 흥분한 군중은 경기장 밖으로 몰려나갔다. 감옥을 부수고 관리들의 집을 불태웠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원로원 의사당, 소피아 성당이 불탔다.

폭동은 이틀 뒤까지 계속됐다. 황제는 군중의 요구대로 관리들을 경질했으나 불길은 가라앉지 않았다. 군중은 전임 황제(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까지 했다. 사태가 계속 악화되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신하들은 탈출까지 고려했다. 이때 의지가 철석과도 같은 여장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황후 테오도라. 『전쟁사』를 쓴 프로코피우스는 항구에 배를 대고 도망치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한 테오도라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폐하께서 목숨을 부지하시기 원하신다면 어려울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고 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뒤, 과연 ‘죽는 것보다야 나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자주색 옷(어의)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수의’라는 옛말이 옳다고 믿습니다.”

동로마 시대 전차 경기장이었던 고대 콘스탄티 노폴리스 히포드롬 광장. 현재는 술탄 아흐멧광장으로 불린다. [사진 픽사베이]
황제와 측근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를 히포드롬으로 보냈다. 두 젊은 장군은 군단을 이끌고 경기장을 급습, 히포드롬 안에서만 약 3만 명을 살해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경기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적은 없다. 히파티우스도 황제 앞으로 끌려갔다. 황제는 그가 허수아비임을 알기에 용서하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반대했다. 한번 권력을 맛본 이상 반드시 화근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히파티우스도 목이 달아났다.

마차 경주에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정신을 지배했을까. 또 하나의 S, 스피드다. 도시 사람들은 속도에 집착한다. 시간이 곧 돈이니까. 말 네 필이 끄는 4두마차 경주는 눈부신 속도로 시민들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마차 경주를 본다면 지루할지 모른다. 속도를 느끼는 감각은 상대적이다. 야구 경기를 보라. 요즘 투수들은 시속 160㎞도 던진다. 하지만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타자가 체감하는 속도는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다. 투수가 시속 110㎞쯤 되는 커브를 던진 다음 130㎞ 정도 되는 직구만 던져도 타자가 얼음처럼 굳곤 한다.

1899년 9월 18일, 한반도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됐다. 미국산 증기기관차 ‘모갈 1호’가 선로를 달렸다. 모갈 1호의 최고속도는 시속 60㎞. 기차는 33.8㎞의 노량진-인천 구간을 1시간 40분에 주파했다. 표정속도(운행거리를 정차시간을 포함한 소요시간으로 나눈 값)로는 시속 20㎞정도다. 자전거도 이 정도 속도는 낸다. 그래도 그 시대에는 ‘폭발적인 스피드’였다. 고관들이 가마를 타던 시절이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돛단배로 9시간 30분이 걸렸다. 개통식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19일자 기사가 있다.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지음, 도서출판 산처럼)

원로원 의사당·소피아 성당 폭동에 불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자랑한 국제도시였다. 시민들은 여간한 자극에는 흥분할 줄 몰랐다. 말이 끄는 수레는 전쟁터에서 요즘의 탱크 역할을 했다.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동·서양을 불문하고 전장의 주역이었다. 최종병기요 첨단무기인 전차가 네 마리 말로 성능을 극대화해 히포드롬에서 빠르기를 다툰 것이다. 4두마차 경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뮬러1(F1) 경기였다. 히포드롬은 비잔틴 시대의 서키트(경주로)였다. 오늘날 모나코 도심을 질주하는 F1 그랑프리를 떠올리면 된다.

시간이 흘러 1500년 세월이 스쳐갔다.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한복판, 히포드롬이 버티고 섰던 자리는 지금 술탄아흐메트 광장으로 불린다. 우뚝 선 오벨리스크가 옛 영화를 증언한다. 히포드롬은 청색과 녹색으로 나뉜 비잔틴 사람들의 함성과 네 마리 준마의 거친 숨소리, 니카의 반란을 피로 적신 폭력, 그리고 황제의 파트너로서 제국을 통치한 여걸 테오도라의 사랑을 간직한 채 영겁의 침묵 속에 잠들었다. 해가 질 무렵, 성 소피아 성당 앞 벤치에 앉았노라면 마르마라해의 석양 너머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라는 아잔만이 무연히 번진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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