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똑같은 수성동계곡의 비밀... 서촌의 겸재 정선 루트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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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루트 따라 걸어본 서촌
조선 후기 사람들이 가장 동경했던 부촌은 어디였을까?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금강산 못지 않게 ‘인왕제색도’ 같은 서울 풍경을 많이 그렸다. 특히 자신과 자신의 후원자들의 집이 모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동네, 바로 지금의 서촌을 ‘장동팔경첩’에 담았다. ‘장동’은 청운동·효자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이름이다. 고관의 지위에 오른 안동 김씨는 장동에 살며 ‘장동 김씨’라 불렸고,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을 주도해 오늘날 ‘조선의 메디치’라 불린다. 이들의 집은 파란만장한 20세기 역사 중에 모두 사라졌지만 정선의 ‘장동팔경첩’을 통해 그 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지금 장안의 화제인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전시에는 두 버전의 ‘장동팔경첩’이 나와있다. 전시 기획자인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과 함께 그림 속 풍경의 현재 모습을 찾아나섰다.

호암미술관, 두 버전의 ‘장동팔경첩’ 전시
“사실 겸재의 그림에 맞춰 이곳이 복원됐답니다.” 조지윤 실장의 말이다. “이곳에 난립하던 판자촌 사람들을 살게 하기 위해 1971년에 옥인시범아파트가 지어졌습니다. 30여 년 후 아파트를 철거하고 인왕산 녹지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나왔는데 조사 중에 (시멘트에 덮여 있던) 조선시대 돌다리가 발견되고 이것이 옛 문헌에 나오는 기린교이며 정선 ‘수성동’ 그림에 나오는 다리라고 추정됐습니다. 그래서 서울시에서 기린교를 중심으로 정선 그림에 따라 수성동 계곡을 복원(2011년 복원 완료)하게 된 거죠.”
수성동 계곡은 조선 전기에는 ‘풍류 왕자’ 안평대군의 집이 있던 곳이고 조선 후기에는 여항문학(서울 지역의 중인 계층이 이끈 문예)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최고의 명승지였고 특히 수성(물소리)이 시원한 여름 경치로 유명했다”고 조 실장은 설명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본) 에서 '수성동' [사진 호암미술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4162jlhz.jpg)

18세기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자연을 그리거나 중국의 절경을 도식과 상상에 따라 그리는 관념(觀念)산수화가 주류였다. 우리나라의 실제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화도 존재하긴 했지만 “지도 구실을 하는 그림이나 계회도(문인들의 모임을 기록한 그림)였다”고 조 실장은 설명했다. “정선의 그림도 실제 경치를 그린 것이니 실경산수화에 속하지만 따로 ‘진경산수화’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한 기록용 그림이 아니라 이상적인 자연을 그리는 산수화의 전통을 우리나라의 실제 경치와 결합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정선은 조선 사람들이 최고의 관광지로 동경하던 금강산을 수차례 직접 여행하면서 ‘해악전신첩’(1747·보물), ‘금강전도’(국보) 등 걸작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람들이 최고의 주거지로 동경하던 곳이자 자신이 나고 자라 노닐어온 한양 장동을 여러 버전의 ‘장동팔경첩’으로 담아냈다. 전시에 나온 것은 76세 경에 제작한 간송 소장본과 80대 초반에 제작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두 버전에 모두 등장하는 풍경은 지금의 청와대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독락정·취미대·대은암과 경기상고 북동쪽 구석에 터가 표시된 청송당, 자하문로 33길 주택가에 바위만 남은 청풍계 등 5곳이다. 그리고 간송 소장본에는 수성동·필운대·자하동, 중앙박물관 소장본에는 청휘각·창의문·백운동이 포함되어 있다.
‘장동팔경첩’ 그림 속 풍경을 찾아가는 여행은 수성동 계곡 이전에 경복궁역과 좀더 가까운 필운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인왕산 줄기 중턱에 있는 암벽인 필운대는 한양 도성을 조망하기에 최적인 장소였고 특히 봄날에 흐드러진 연분홍 꽃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시를 짓기 좋은 장소였다. 바로 그런 장면이 정선의 또다른 그림 ‘필운대상춘도’에 나온다.
![겸재 정선의 '필운대상춘도' 개인 소장 [ 사진 호암미술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5396fkkp.jpg)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본) 에서 '필운대' [사진 호암미술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5878ntoi.jpg)

그러나 지금은 배화여고 후원에 있고 앞이 학교 건물에 가로막혀 절벽에서 서울을 굽어볼 수 없다. 다만 암벽의 수려한 형태와 거기 새겨진 ‘필운대’ 글씨와 몇 줄의 시구로 옛 정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필운’은 ‘오성과 한음’의 오성으로 유명한 문신 이항복의 호다. 그는 장인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인 권율 장군으로부터 이곳의 집을 물려받아 살았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에서 '청휘각' [사진 호암미술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7024qfzn.jpg)
그 이름에 걸맞게 일대는 맑은 햇빛과 바람이 가득했고 내리막길에 늘어선 주택들 너머로 서울 시내의 고층건물과 남산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조 실장은 말을 이었다. “장동 지역에서도 높고 좋은 곳에 집을 지은 김수항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죠. 그는 노론의 영수였고 훗날 노론이 출생 때문에 입지가 약했던 영조를 지지하면서 영조 때 그의 집안은 번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도가 안동 김씨, 그 중에서도 장동 김씨죠.”
하지만 장동에 안동 김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에 역관, 의원 등 중인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최고의 부촌이자 명승지인 장동에 집을 삽니다. 그리고 수성동·필운대·청휘각 등에서 시 모임을 하면서 여항문학을 꽃피웠죠.” 조 실장은 덧붙였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본) 에서 '청풍계' [사진 호암미술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7429xftm.jpg)

그러나 지금은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기와집과 늠름한 잣나무는 자취도 없고 현대 주택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다만 청풍계 후원에 보이던 ‘백세청풍’을 새긴 바위가 어느 주택 아래에 남아있다.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맑은 기풍’이라는 뜻으로 고대 중국의 전설적 형제 백이·숙제의 충절에서 유래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20주기 제사가 열린 지난 2021년 최초로 공개된 그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의 모습. [중앙포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8288vmca.jpg)
사실 정선의 그림에는 순수한 선비의 이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 비슷한 욕망, 즉 자연을 동경하면서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도시를 떠나기 싫은 욕망이 담겨 있다. 송희경 겸재정선미술관 관장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말기에 바로 이런 욕망에 의거한 ‘시은(市隱·도시에서 은거하다)’ 문화가 있어, 권력과 재력이 있는 자들이 도성 안에 자연을 끌어들인 아름다운 주거 공간을 지었다. 장동 김씨를 비롯한 조선 후기 경화세족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 아들에게 “한양 10리 안 살아라”
장동 김씨가 그 욕망을 실현한 반면, 많은 이들은 실현하지 못한 채 매달렸다. 한양과 지방의 경제·문화적 격차가 심해진 까닭이었다. 송 관장은 실학자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구절을 소개한다. “만약에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한양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앞으로는 오직 한양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서울 공화국’의 폐해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선의 ‘장동팔경첩’은 ‘인서울’에 성공한 데다가 최고의 부촌에 자리잡은 이들의 집들을 그린 그림으로서 “부와 권력의 상징인 ‘집’이 집주인의 자화상으로 기능한 셈”이라고 송 관장은 말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에서 '창의문' [사진 호암미술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2/joongangsunday/20250522140338624ufdj.jpg)

이쯤 되면 ‘예나 지금이나 역시 재력인가’라는 서글픈 생각도 들겠지만 ‘겸재 정선 루트’의 북단에 위치한 창의문(북소문)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다양한 주택들이 공유하는 수려한 북악산 풍경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들으면 소리 되고 보면 그림 되어, 가져도 금하는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라는 소동파의 시 ‘적벽부’ 구절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조 실장도 말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이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산수화의 전통에 우리 주변의 산천을 대입한 것입니다. 결국은 ‘이상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다’라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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