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사람 이야기(9) 장교 이환희의 추억-①

이세영 2025. 5. 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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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건축가 건축환경연구소 광장제공, 사진가 김중만 작품

20여년 전쯤이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들과 점심을 먹었다. 여학생이 둘, 남학생이 둘, 다들 아이들 잘 키우고, 잘살고, 당시에도 현역으로 자기 일 잘하는 친구들이었다.

그중에 여학생 하나는 남편이 서울공대 토목과 출신으로 골프장 설계의 대가로 잘 알려진 분인데, 원래는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 전투기 조종사 생활을 하다가 서울대에 위탁교육을 와서 공대 기숙사에서 나와 함께 지낸 기억이 있는 분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함께 공군에서 와서 건축과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공부하고 함께 졸업한 이환희 대위가 생각이 나서 한참 동안 이 대위 이야기를 나눴다.

이 대위는 당연히도 우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그는 처음에 공군 중위의 정복을 입고 학교에 왔다. 물론 공사를 졸업하고 군 장교 생활하다가 왔으니 우리들보다는 사회 경험도 많았다. 그런데 그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인 말로는 내가 서울대에 와서 아는 척할 것이 무엇 한 가지 티끌만큼이라도 있겠느냐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배우려 하고 물어보고 우리 반의 공동생활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따라오는 자세를 철저히 견지했다.

우리는 멋진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어쩌다가 낙마해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고 짐작했다. 그가 왜 다른 학교에 국비를 받아 위탁교육생으로 공부를 다시 하러 오게 됐는지, 그게 궁금해서 그의 인생 스토리를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게는 낙마한 이야기를 풀어놓기가 대단히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친구들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라도, 그는 거리낌 없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훌륭하고 자질 있는 장교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그는 어느 해 국군의 날 축하 비행 연습 도중 편대 비행에서 지켜야 하는 비행기 사이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잘못 지켰단다. 그래서 두 비행기가 부딪칠 뻔한 작은 사고에 책임을 지고 조종사 생활을, 그 평생의 꿈을 접은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가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별 느낌이 없다. 그러나 설명을 듣다 보면 그 엄청난 속도의 비행 중에 비행기끼리 거리가 서로 부딪힐 만큼 가까워진다는 일이 얼마나 순식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에 책임을 물어서 다시는 조종간을 못 잡도록 해야 한다는 엄청난 처벌과 무지막지한 규정의 엄격함에 놀라울 뿐이었다. 설사 조종사 지망생이 너무 많아서 작은 실수라도 핑계 삼아 사람을 솎아내는 게 목적이라 할지라도, 한 젊은 장교의 명예와 자부심과 삶의 의미 자체를 꺾어 버린다는 그런 결정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관학교 출신으로 조종사가 못 된다는 일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고시 시험에 붙지 못한 것과 비슷한 경우가 된다. 아니, 의과대학 졸업하고 의사가 못 되어 의료기 사업을 한다거나, 건축과 졸업하고 설계 대신에 건재상을 경영한다거나, 뭐 그런 처지다.

군 상부에서 그런 결정이 내려지면 몇 가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는데 그중에서 그래도 유능하다고, 아깝다고 인정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드문 기회가 국립대학에 위탁돼 새로운 전공을 이수하고 다른 방법으로 군에 봉사할 기회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중에는 시험을 통해 아주 우수한 학업능력이 증명되면 극히 소수가 서울대에 오게 되는데, 그나마도 학비와 생활비를 대어 주지만 기대한 만큼 어느 수준이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는 군으로 다시 소환돼야 하는 아슬아슬한 운명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다. 특별히 시험에 관하여서는 기록으로 남고 결과가 보고되는 탓이었는지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생각해 보면 안쓰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성적이 나빠서 군대에 다시 소환된다는 일은 그에게는 인생의 끝장인 것 같았다.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하면 그럼 뭐가 되느냐? 내가 술김에 웃으며 물어보면 그도 웃으며 대답했다.

"건축과 졸업하고 돌아가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공군 내 위치는 공군 시설감 한자리밖엔 없지."

공군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이나 나아가 정치인을 꿈꿀 수 있던 젊은이답지 않게 군대 물에 닳아빠진 듯, 자조라도 하는 듯, 그런 대답이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학교에 불만이 많았던 나로서는 철저히 학교생활에 충실한 그의 태도가 나와는 정반대로만 보였고, 그래서 나는 더욱더 그에게 못되게 굴었다.

그는 우리 반의 '놀자판' 분위기가 싫었고 걱정도 됐던지 자주 우리에게 휴강을 선동하는 걸 말리려고 했다. 한 반의 40명 가운데 17명이 같은 고교 출신이었으니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강의든 휴강하자고 의결할 수가 있었고, 그런 통고를 받으면 어떤 교수도 동의했다.

그 바람에 우리의 1학년 한 해 강의는 휴강이 잦았다. 사실 그 엄청난 고3 시절을 보내고 난 서울대 1학년생이란 타이틀로 놀고 싶어서 환장한 녀석들 같았다.

휴강이 결정된 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빈 강의실에 남아 교과서를 들척이는 그에게 나는 자주 빈정거리곤 했다.

"형, 놀아요, 놀아. 인생은 짧아요, 그거 몰랐어요?"

내가 1학년 겨울방학부터 배를 만들어 2학년 여름 방학에 태평양을 횡단하겠다고 비밀스럽게 그에게 고백했을 때, 그는 엄청나게 놀라 했다.

정말로 미친놈이 정말 미친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물어봤다.

사고뭉치 동생을 둔 형이 자기 일보다 더 걱정스럽다는 듯, 집안 형편부터를 시작으로, 사상적 동향까지를 시시콜콜 따지듯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이 마치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는 듯했다. 아니, 마치 그가 정신과 의사가 돼 환자를 상담하는 태도였다는 쪽이 맞겠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을 나에게서 듣고 나서는, 새로운 걱정, 즉 현실적인 걱정을 나보다도 훨씬 더 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조난 구명에 관한 사항이었는데, 며칠 동안 고민을 하고 난 다음에 나온 그의 제안은, 공군에서 파일럿들이 조난했을 때 취하는 대책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조종사가 바다에 떨어지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비상 신호 발신기를 가동하는 일인데 이 자동 발신 장치는 SOS 신호를 자동으로 보낸다고 했다.

적어도 인천항에서 연안을 따라 서해와 남해를 거쳐 부산에 도착할 항해 구간에는 군산에 있는 공군 해상 조난 구조대(?)라는 그곳에서 수신하는 즉시 구조기를 파견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구명보트 작동과 동시에 조종사들이 휴대하는 생존키트(survival kit)를 작동하면 우선 구명보트에 상어 떼가 달려들지 않도록, 상어들이 가장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는 노란 약품이 바닷물에 퍼진단다.

이 색깔은 동시에 구조대가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조난선박을 쉽게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면서 자신이 그 모든 필요한 조치와 장비들을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우리의 '태평양횡단계획'이 기밀누설로 실패하고, 우리가 생명보다 더 아끼던 배를 빼앗기게 됐다. 내가 한창 실의에 빠져있던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돼 등록하면서 기숙사 입사 신청을 할 때 일이다.

이환희 중위(당시 계급)가 내게 새 학기에는 자기와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면 어떻겠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말인즉슨 "야, 너희들 김원, 남신우, 두 놈이 룸메이트를 하니 너무 술만 먹어서 안 되겠더라. 너희들 그러다 죽는다, 정말!"

그렇게 거칠게 시작했다. 하기야 나도 마침 신우와 한방을 쓰며 한 학기를 보내고 난 후 평가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너무 술을 마시는 커플(?)이었다. 기숙사생 600명 중 최고로 인생을 고뇌하는 '햄릿' 같은 사람들이었다. (계속)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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