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탐구] 싱그러운 품 안에서 ‘구례’ | 전원생활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5월호 기사입니다.
여린 새순 돋아나는데, 마음은 미동조차 없다. 똑똑 두드려보나, 반응이 없는 건 매한가지. 연초부터 정신없이 달려온 일상. 쉼표를 찍어줄 때가 왔나 보다. 그래서 구례로 향한다. 전남 동부에 자리한 구례는 곡성·순천, 전북 남원·임실, 경남 하동과 이웃한다. 지리산에서 뻗어 나온 능선이 구례를 감싸고, 팔공산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그 품을 지나간다. ‘구례는 초봄에 가야 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벚꽃과 산수유가 흐드러진 풍경도 아름답지만, 초록빛의 생명이 차오르는 강산도 그 못지 않게 눈부시다. 애써 뭘 해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구례를 찬찬히 둘러본다. 고즈넉한 사찰에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 바라본다. 지리산치즈랜드와 섬진강대나무숲길에서는 자연을 배경 삼아 인생 사진을 남긴다. 200년이 넘은 한국식 정원의 유려한 정취에 취해본다. 태고의 숨결 간직한 지리산 노고단을 오르고,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어둡던 마음에 초록빛이 감돈다.

5월에도 화엄사는 아름답다. 각황전 옆으로 난 108계단을 오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숨이 가빠질 무렵 시야가 트인 공간이 나온다. 연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신록 사이로 웅장한 팔각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음양의 조화처럼 연약한 것과 단단한 것, 여린 색과 강한 색의 어우러짐을 본다. 저 멀리에선 맑은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기암절벽에 지어져 모습이 독특한 암자가 있다고 해, 해발 531m의 오산으로 향한다. 마을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오산 사성암에 도착한다. 백제시대에 지어진 이 암자의 대표 건물은 기암절벽 위에 여러 개의 기다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약사전이다. 건물 안에는 원효대사가 암벽에 손톱으로 새겼다는 전설이 있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구례의 풍경이 볼만하다. 웅장한 지리산 연봉에 안겨 있는 구례가 더없이 편안해 보여 시샘이 난다.

농장은 박윤규(77)·진한숙(72)씨 부부가 운영한다. 부부는 농장에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싶은 마음에 15년 전부터 수선화를 손수 심어왔다. 수선화는 4월이 절정이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꽃이 진 수선화의 푸른 대도 색다른 배경이 돼줄 테니.
농장을 나와 섬진강 변을 따라 드라이브한다. 습기를 좋아하는 대나무들이 본능적으로 섬진강 변을 찾아왔나 보다. 강을 따라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대나무숲을 쉽게 마주한다. 그중 섬진강 대나무숲길은 시원한 느낌의 사진을 남기기 좋은 곳. 구불구불한 길 양옆으로 4m가 넘는 대나무가 하늘로 뻗어나가는데, 그 길 위에 서서 인생 사진을 남겨본다. 길을 걷다 무심코 옆을 바라본다. 강의 윤슬이 대나무 대 사이사이로 모습을 반짝 드러냈다 감춘다.

고택 입구에 놓인 성인 키보다 훨씬 큰 나무통에서도 그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씨에게 이 통의 용도를 물으니, ‘쌀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겉면에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이 능히 가져갈 수 있다)’라 쓰여 있다. 그 옛날 가난했던 사람들이 언제든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배려한 마음이 아름답다. ‘모든 이에게 예를 베풀고 인심이 후한 고장’이란 뜻의 구례(求禮) 지역 이름에 딱 어울리는 고택인 셈이다.
상사마을에 있는 쌍산재는 약 200년 전에 건축된 해주 오씨 종가의 고택이다. tvN 예능프로그램 〈윤스테이〉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방송 이후 연간 10만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유명 관광지가 됐다. 공간은 살림집·서당·별서정원으로 나뉘는데, 2018년 전라남도 민간 정원 5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특히나 아름답다.
쌍산재의 별서정원은 고택의 화려한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나무숲 사이로 난 돌계단을 지나 정원에 다다른다. 작약·모란·배롱나무·동백나무 등 다양한 초목이 자라나고 있다. 마루에 앉아 정원을 바라본다. 살살 흔들리는 여린 잎에 마음이 살랑인다.

정상에 다다르니 첩첩이 이어지는 지리산 산새, 여린 분홍빛의 철쭉, 환히 빛나는 섬진강의 모습에 탄성이 나온다. 돌로 쌓아 만든 4m 높이의 제단도 눈에 띈다. 이 제단 때문에 노고단은 전국의 산봉우리 가운데 드물게 ‘봉’이나 ‘대’가 아닌 ‘단(제사 터를 의미)’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노고단은 계절별로 각기 매력이 다르다.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원추리, 가을엔 단풍, 겨울엔 설화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봉우리다.
여행의 끝, 아쉬운 마음에 섬진강으로 향한다. 떨어지는 해를 눈에 담을 예정이다. 붉은빛의 해가 산 뒤로 넘어가자, 섬진강도 붉게 물든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5’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구례는 부채 제작에 적합한 연녹빛의 왕대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이에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광의면 하대마을은 ‘부챗살 제작 특산단지’였어요.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이 고령화하며 부채 제작을 관둔지라 현재 김주용 장인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김씨는 지리산 자락에서 3000여 평(약 1㏊)의 대나무숲을 직접 가꾼다. 지리산은 대나무가 자생하기에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렇기에 이곳에서 자란 대나무는 단단하고 탄성이 좋아 부챗살을 만들기에 가장 적합하단다.
“겨울이 오면 대나무를 수확하러 가요. 이때 목질이 가장 단단해지거든요. 이후 대나무를 자르고 가공한 후 속대를 얇게 떠내 부챗살을 만들어요. 펼쳐서 모양을 내고 한지나 모시 등에 풀을 발라 압착한 다음에 부채 모양으로 자르고 손잡이를 달면 완성이에요.”
대나무 수확부터 부채 제작까지 전 과정을 손수 작업하는 공방은 전국에서 죽호바람뿐이다. 한편, 이곳에선 곡두선, 세미선, 합죽선 등 전통부채와 현대적 감각을 더한 이색 부채 200여 종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부챗살 무드등 만들기’ ‘전통부채 만들기’ ‘압화 부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4명 이상부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전화 예약은 필수이다. 죽호바람에서 구례의 자연을 재료로 선선한 바람을 직접 만들어봐도 좋겠다. 문의 061-781-7238

“인력이 모자라다 보니 고사리 수확 철인데도 제대로 수확을 못 하는 농가가 생겨났어요. 그러던 차에 사람들이 직접 수확해서 가져가게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와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어요. 어르신들이 옛 향수를 느끼려고 많이 오세요. 예약이 다 찰 정도로 반응이 좋아요.”
체험 프로그램은 고사리 수확 철인 4~6월에 화개장터 인근 5만 평(16.5㏊) 규모의 농장에서 진행된다. 오전이나 오후, 또는 종일 시간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비용은 오전·오후 기준 2만 원이다.
“많이 캐 가는 분은 반나절 동안에도 10㎏짜리 가마니 세 개를 꽉 채워요. 시중에서 이만큼은 8만 원 정도니 밑지는 장사죠(하하). 유기농으로 자생하는 싱싱한 고사리를 뜯는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문의 061-782-0822

“독일 유학 시절에 식사 대용으로 담백한 빵을 먹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담백한 빵을 찾기 힘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크림이 많이 들어간 달콤한 빵이 인기였거든요. 그럼 직접 만들어보자고 마음 먹고 빵집을 차렸어요.”
마침 장씨의 고향인 구례는 밀 주산지였으며, 아버지가 3000평(약 1㏊) 규모의 호밀농사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우리나라 고유 품종인 ‘황금알밀’ ‘아리흑밀’ 등을 공급받아 담백한 호밀빵과 치아바타 등을 만들기 시작했고, 금세 입소문이 나 유명해졌단다. 우리 밀로 만들어 건강하고, 먹고 나서 속이 편해 40~50대에게 특히 반응이 좋다. 구례의 농산물을 이용한 구례 쑥부쟁이치아바타, 젠피긴빵 등도 눈길을 끄니, 꼭 들러 구례의 들녘을 품은 빵을 맛보자. 문의 0507-1400-1477

그는 2년 전, 비어 있던 시골집을 고쳐 책방을 만들었다. 시골집만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자 처마·서까래·마루 등은 그대로 뒀다. 손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처마 밑의 방석 자리다. 마당의 싱그러운 앵두나무를 눈에 담고, 포근한 햇볕을 받으며 여유롭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구례의 ‘무난한 편안함’에 반해 귀촌했다는 방씨. 그가 좋아하는 구례의 분위기가 책방에 그대로 담겨 있다.
책방로파이는 시인과 뮤지션이 함께 하나의 무대를 선보이는 ‘랑데뷰’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하다. 마당에 옹기종기 앉아 시인의 시 낭송과 뮤지션의 공연을 코앞에서 즐길 수 있다. 5월 10일엔 김현·전욱진 시인과 곽주나·허정혁 뮤지션의 합동 공연이 예정돼 있다.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다면, 책방로파이에 가 문학을 읽고 음악을 귀에 담아보자. 문의 0507-1392-5733
아기자기한 소품 숍, 놀다가게

“반달곰 스티커는 제가 직접 제작했어요. 학창 시절에 디자인을 배웠거든요. 이 반달곰 인형은 동네에 뜨개질을 잘하는 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제작을 부탁해 만들었어요.”
그는 올해 구례군청에서 로컬크리에이터로 선정돼 섬진강, 반달곰 등에 영감받은 머그잔과 손수건도 새로 제작했다. 조만간 놀다가게에서 판매할 예정이라니 방문해서 구례를 추억할 만한 기념품 하나를 골라보자. 문의 0507-1403-7214
<현지인도 반한 구례 맛집>
구례 특산물의 색다른 변신지리산부부솥밥

국화과 야생초인 쑥부쟁이는 구례 특산물이다. 사장 부부는 구례를 대표하는 음식을 만들고자 쑥부쟁이 솥밥을 개발했단다. 솥밥 뚜껑을 여니 쑥부쟁이와 표고버섯 향이 얼굴을 와락 감싼다. 직접 채취한 쑥부쟁이를 사용하는지라 향긋함이 그대로라는 평을 받는다. 반찬으로 나온 야들야들한 수육, 부부가 직접 캔 달래로 만든 장을 밥 위에 듬뿍 올려 먹으니 수저를 놓을 수 없다. 각종 염증 완화에 탁월한 쑥부쟁이, 맛있게 먹고 건강까지 챙겨보자. 문의 0507-1440-0135
신선한 산나물과 함께 즐기는 닭구이 당치민박산장

닭구이 먹으러 갔다 반찬에 반하고 오는 식당. 이정운·박재숙 씨 부부가 30년 넘게 운영해왔다. 돌판에 자글자글 구워낸 닭구이도 맛있지만, 곁들여 나온 산나물·장아찌에 눈길이 더 간다. 부부는 자신들이 소유한 산에서 산나물을 직접 재배해 재료의 신선함을 유지하며, 자연에서 채취한 그대로의 맛을 전하고자 나물의 가공을 최소화한다. 반찬의 감칠맛 비밀은 부부가 개발한 고로쇠 간장에 있다. 닭구이에 갖가지 산나물을 얹어 다채로이 즐겨보자. 문의 010-9111-7949
싱그러운 팜투테이블지리산소풍 새참먹는시간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인장이 싱그러운 채소를 그릇에 담는 모습부터 보인다. 농부인 그는 1주일 가운데 4일은 농사를 짓고 3일은 식당을 운영하는데, 직접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를 재료로 삼는다(부족한 재료는 로컬 마켓에서 구매한단다). 표고두부튀김·우리콩고로케·매실유부초밥 등 색다른 비건식을 맛볼 수 있는 곳. 주마다 메뉴가 바뀌니 인스타그램(@adishforabird) 확인은 필수다. 문의 0507-1332-4121
섬진강의 시원함이 그대로 묵돌이

〈전원생활〉에서 20년 넘게 일한 사진 기자가 구례에 촬영갈 때면 꼭 들르는 단골 식당. 다슬기 수제비, 다슬기 맑은탕 등을 선보인다. 할머니들이 섬진강에서 날마다 잡아오는 자연산 다슬기를 쓴다. 대표 메뉴는 다슬기 수제비. 다슬기, 마늘, 약간의 간장을 넣고 끓인 푸른빛의 국물은 그 색깔처럼 시원하고, 부들부들한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쭉쭉 뜯어내 만든 수제비는 보드랍다. 깔끔한 맛이라,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도 몸이 가볍다. 문의 061-781-2415
산수유의 붉은빛 품은 사계양갱

특별한 디저트를 찾는다면 산수유 양갱은 어떨까. 구례에서 나고 자란 청년 강미선 씨는 “산수유즙도 좋지만 MZ 세대도 사로잡을 만한 가공품을 만들고 싶어 산수유 양갱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남녀노소의 입맛을 모두 사로잡고자 산수유 특유의 떫은맛을 잡는 데 특히나 심혈을 기울였다고. 산수유를 머금은 양갱의 붉은빛은 영롱하며, 그 맛은 달콤하면서도 새콤하다. 구례의 소품 숍인 ‘놀다가게’와 베이커리 카페인 ‘크롤크롤’에서 구매할 수 있다. 문의 010-8696-2393
글 윤혜준 기자 | 사진 임승수(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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