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멈추고 나아가며 사랑하는 대학로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5. 5. 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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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뮤지컬 '하트셉수트'를 관람했다. 서울 대학로자유극장에서 지난 3월에 개막한 후 관객들의 입소문 속에 매진행렬을 이어가는 창작뮤지컬이다. 인기에 힘입어 오는 6월8일까지 연장공연을 한다는데 창작공연예술산업이 침체한 중에도 대학로를 중심으로 뮤지컬, 연극 등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빛을 밝힌다.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이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던 나희덕 시인의 시 '귀뚜라미'가 떠오른다.

하트셉수트는 고대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다. 그녀의 미라가 발굴됐을 때 신원미상의 여성 미라 한 구가 함께 출토됐다는 고고학적 진실 위에 뮤지컬은 '사랑'의 상상력을 입혀 매혹적인 서사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스토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가 빼어난 작품이다. 이날 공연에선 신의정이 파라오 '하트셉수트'를, 최수현이 호위무사 '아문'을 연기해 2인극임에도 무대의 빈 곳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꽉 찬 에너지를 보여줬다. 관객을 향해 바깥으로 팽창하는 원심력과 배우에게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구심력이 모두 팽팽했다.

하트셉수트와 아문의 노래 '겨눈다'가 끝난 후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기 직전의 짧은 암전 속에 울려퍼지는 환호에 놀랐다. 물론 뮤지컬은 클래식 공연처럼 '악장 박수'가 금기는 아니다. 내가 놀란 것은 관객들이 박수를 쳐야 하는 타이밍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다. 즉 다수의 관객이 'n차 관람'을 했다는 얘긴데 뮤지컬에선 흔한 일이다. 평일 저녁이고 봄이라기엔 굉장히 추운 날씨였음에도 매진됐다. 같은 작품, 같은 장면이라도 배우들은 회차마다 약간의 변주를 준다. 그런 노력이 있어 처음 관람하는 관객과 n차 관람하는 팬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극장 앞에서 배우와 관객이 직접 만나 소통하는 것은 대학로만의 문화가 됐다. SNS에 접속하니 내가 출강하는 단국대와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학생들도 그날 대학로에 와 있었다. 수필가이자 서양화가며 시인 이상, 화가 김환기와 결혼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김향안의 생애를 그린 창작뮤지컬 '라흐헤스트', 기형도의 시를 연극화한 옴니버스극 '기형도 플레이' 등을 관람한 인증샷을 올려둔 것이다. 대학로는 살아 있다. TV와 유튜브 바깥의 진짜 세계에서 공연예술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그 숨결을 함께 호흡하는 젊은 관객들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Aura)를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것이 뿜어내는 재현 불가능한 영적 광휘"라고 했다. 레코딩 기술이 발명되면서 아우라는 위기를 맞는다. 복제된 이미지와 음반이 언제 어디서든 예술작품을 무한대로 반복해서 감상할 수 있게 해주면서 예술작품은 그 신비의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예술작품을 현장에서 실시간 감상하는 감동까지는 재연할 수 없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로 대중문화 시대가 열렸다며 이를 반기면서도 '지속적인 체험의 기회'가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 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 보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있는 시간과 장소로 나아가야 하고 그 나아감 가운데 우연한 아름다움과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예술감상에는 그런 지속적 체험이 없다. 그날 밤 쌀쌀한 저녁 공기를 지나 어두운 극장 객석에 앉은 내가 신의정, 최수현 두 배우의 연기와 노래에서 감각한 것은 기술문명 시대를 거스르는, 오직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는 숭고한 빛, 바로 아우라였다. 한 편의 뮤지컬이나 연극을 감상한다는 것은 어느 하루의 세상을 황금빛으로 바꾼다는 얘기다.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오규원, '순례 序') 체험이 있는 대학로에선 작은 떨림도 운명적 사랑이 될 수 있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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