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책 소개한 가짜 서평…가짜 같은 세상에 던진 농담[책과 삶]

SF 거장 렘의 원서 2권 묶어 출간
창작의 자유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서사에서 의미 찾기에 “게을러진”
현대인의 모습에 대한 풍자로 읽혀
“그것은 커다란 책 모양의 상자였는데 안에는 설명서와 구성품 목록 그리고 ‘소설 짓기의 기본요소’ 일체가 들어 있었다. 그 요소들이란 서로 다른 넓이의 종이띠에 인쇄된 조각난 산문이었다.”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에 나오는 ‘두 유어셀프 어 북’은 저자가 “출판시장의 종양”이라 부르는 소설 짓기 세트에 대해 다룬다. 저작권 기한이 만료된 문학작품들의 내용을 마음대로 뒤섞어 재조합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세트를 사용하면 “안나 카레니나는 귀족 브론스키가 아니라 하인과 불륜하게 하는 등등이 가능”하다.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 정보라 옮김
현대문학 | 464쪽 | 1만8800원
놀라운 것은 ‘두 유어셀프 어 북’의 탄생이라기보다 죽음이다. 일부 비평가나 출판가들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이 세트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타락시키지 않으려고 다들 고귀하게 손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독자들이) 그저 삼류 글쟁이의 책과 톨스토이의 역작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사라진다.
대중은 “톨스토이의 역작을 읽어도 삼류 소설을 읽었을 때만큼 심드렁”하고 “자기 손으로 누군가를 겁탈하거나 발가벗기거나 괴롭히려 들기에는 이미 너무 게을러졌다.” 긴 서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재미를 발견하는 일보다 사실인지 확인조차 어렵지만 짧고 친절한 쇼츠 콘텐츠 등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은 철학과 인문학을 두루 아우르는 SF 작가로 불리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원서 두 권을 한 권으로 묶어서 출판했다. ‘두 유어셀프 어 북’을 포함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서평 16편을 모은 <절대 진공>(1971)과 가상의 책 서문 5편 및 발췌문 1편을 엮은 <상상된 위대함>(1973)이다.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서평, 오직 아이디어만을 놓고 보면 이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 작가들이 시도한 영역을 다시 들고 온 것에 대해 저자는 존재하지 않는 책의 서평 서문에 해당하는 ‘절대진공’에서 “있는 그대로 말해버리기에는 자신의 관점이라 해도 너무 뻔뻔하게 느껴지는 생각들에서, 헛되이 꿈꿨던 모든 일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일종의 농담 혹은 조롱으로 보이기도 하는 작가의 글쓰기는 창작의 자유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자 하는 렘의 시도처럼 느껴진다.
가상의 작가 마르셀 코스카가 쓴 ‘로빈슨 연대기’를 보자. 서평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이후 로빈슨에 대한 수많은 2차 창작물을 비판하며 시작하는데, 이 중 ‘로빈슨 연대기’를 두고 “작품의 핵심은 고독의 사회학,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는 완전히 군중으로 가득 차서 터지려고 하는 무인도의 대중문화”에 대한 얘기라고 설명한다.
‘이타카 출신 오디스’는 인류의 사상적 발전은 집단의 노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문명의 손실을 막기 위해 1급 천재를 찾아 보호하는 내용을 담은 책에 대한 서평이다. ‘존재주식회사’의 서평은 주문한 삶을 제공하는 서비스 기업 존재주식회사를 소재로 하는 소설을 다룬다. 존재주식회사는 고객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과, 컴퓨터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고객의 운명을 돌보는 덕분에 일어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애쓴다.
‘비트 문학의 역사’에 대한 서문은 “인간이 만들지 않은, 즉 실제 작가가 인간이 아닌 모든 창조물을 뜻”하는 비트 문학을 다룬 책에 대한 가짜 서문이다. 서문은 기계의 휴식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비트 문학의 탄생과 발전 양상, 비트 문학의 사조 분류와 이에 대한 연구 방법론까지 전 5권에 달해 쓰인 비트 문학 개론을 압축해 설명한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 각종 일반적인 글쓰기는 물론 소설과 시 등 예술적인 글쓰기 작업에 적극 활용되는 현시대에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지난해 <도쿄도 동정탑>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일본의 작가 구단 리에는 수상 기자회견에서 “글쓰기 과정에서 챗GPT를 적극 활용했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단 리에는 올해 신작을 발표하며 이번에는 “책의 95%를 AI가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렘은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필립 K 딕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SF 거장으로 불린다. 2006년 사망했다. 그의 작품 중 <솔라리스>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번 책은 SF 작품을 쓰며 슬라브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한 소설가 정보라가 번역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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