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세상읽기]


박록삼 | 언론인
정의의 실현 수단으로서 사법은 그 방향과 내용만큼이나 속도 역시 중요하다. 죄가 있다면 제때 벌을 줘야 할 것이고, 죄가 없다면 신속하게 풀어주는 법 집행의 적시성은 중요한 정의 실현 과정의 하나다. 늘상 인용되곤 하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조금씩 표현이 바뀌지만 19세기 후반 영국의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등이 언급하며 널리 회자됐다.
우리 헌법 또한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현실은 달랐다. 한해 동안 5만5천건이 넘는 사건이 접수되는 대법원에서 재판의 지연은 필연이었다. 1년은 기본이고 기약 없이 2~3년을 넘기기 일쑤였다. 사법 정의 또한 그 시간만큼 지연되어온 셈이었다.
2025년 5월1일 오후 3시 조희대 대법원장을 필두로 하는 대법원은 신속 재판의 전형을 이뤄냈다. 그리고 예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들고나왔다. 대법원은 소부에 배당한 지 2시간 만에 전원합의체로 회부하고 단 이틀 만에 7만쪽 가까운 사건 기록을 읽고 초고속 재판을 진행했다. 또한 최소 10일 전 대법관 기일 통보의 원칙,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의 원칙 등을 다 건너뛰었다. 헌법과 법률, 대법원 내규 절차, 기존 판례 등을 모두 무시하면서 원심 무죄 판결을 뒤엎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대법원의 속전속결은 지난해 12월3일 내란 쿠데타처럼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지난 7일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파기환송심 첫 공판을 6월18일로 연기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쿠데타가 실패했듯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 쿠데타’도 국민의 저항 앞에 좌절한 셈이다.
하지만 대법원이 보여준 민낯의 파장은 쉬 가라앉기 어렵게 됐다. 이 희대의 대법원 판결은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바닥으로 내팽개치게 만들었음은 물론, 노골적인 선거 개입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헌정 질서 자체를 위협했다. 채 한달도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에서 최고 유력 후보의 피선거권을 박탈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려 했다. 내란 사태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내란 정부의 총리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덤비는 세상이니 대법원장이라고 정치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대법원으로서는 과거 진보당 조봉암과 인혁당 사법살인 등 사법부의 부끄러운 흑역사가 있었고, 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거래 등 사법농단도 있었다. 최고법원으로서 권위는 늘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대법원 판결이 국민 주권의 직접적인 체감 영역을 건드리지 않았기에 특정 인물 또는 정당을 악마화하는 것만으로 대중의 분노에서 비켜 가기에 충분했다. 대법원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기득권의 이익을 넉넉히 지켜낼 수 있었다.
국민 주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헌정 질서까지 위협한 이번 판결로 그 점잖은 가면이 벗겨졌다. 대법원이 기득권 카르텔의 일원으로서 존재감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 됐다. 내란의 잔존 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으며, 헌정 질서 회복의 과제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일깨워줬다.
12·3 내란 사태 당시 단 한마디 입장 표명도 하지 못한 비겁함이나 초유의 법원 폭동 침탈 사태에 대해서도 사법의 엄중함 한마디를 못 한 유약함은 그냥 비겁함이나 유약함이 아니었을 수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내란의 밤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는데, 과연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 분명히 조명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렇듯 대법원이 국민 주권을 부정하려 한 만큼 주권자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명제는 이제 사법부가 아닌, 국민의 몫이 됐다. 지연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사법부, 특히 조희대 대법원장은 법과 정의의 실현 주체가 아닌 심판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전락시켰다. 사법 개혁은 내란 종식과 더불어 중요한 이슈가 됐다. 국민의 근본적 권리 실현이 지연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민주주의와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자칫 내란 수괴가 검찰, 법원 등 잔존한 내란 카르텔에 의해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헌정 질서 파탄의 세상을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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