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명화산책]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 英 터너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문학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풍경화에는 터너가 있다" 풍경이 남긴 빛의 묘사에 몰두…공기 움직임까지 빛과 색채로 표현
"나는 내가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느낀 걸 그린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년)의 말이다. 그는 "영국 문학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풍경화에는 터너가 있다", "네덜란드에 반 고흐, 스페인에 피카소가 있다면 영국엔 터너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 근대 미술의 아버지, 영국의 국민 화가로 불린다.
풍경화라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적 완성을 이뤘으며, 이는 인상파 화가들에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자연 묘사에서 나아가 낭만적·환상적 화풍을 수립했으며, 영국 최초의 '빛의 화가',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풍경이 남기는 빛의 묘사에 몰두했다. 당시 풍경화로는 전례가 없이, 자연이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 속 사물이나 공기의 움직임까지 빛과 색채로 표현하려고 했다. 터너는 평생 독신으로 빛과 색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The Fighting Temeraire)는 테메레르호가 증기 예인선에 의해 견인돼 런던 남동부로 이동하는 마지막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터너는 붉은 저녁노을 속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범선을 바라보며 저물어가는 구시대를 떠올리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으로 검은 증기선을 그려 넣었다.
테메레르호는 참나무로 만든 3층짜리 전함(戰艦)이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격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영국 함대의 상징이자 영국인들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1820년대부터 주로 보급선으로 사용돼 결국 돛대 등이 제거돼 빈 선체만 남아 예인선에 의해 퇴역되는 운명에 처했다.
터너는 바로 그 역사적인 순간을 캔버스에 재현했다. 석양이 붉게 물든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테메레르호는 흐릿하고 창백하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가는 쓸쓸함이 가득하다. 주인공인데도 뒤쪽에 위치한다. 그 앞에는 화염을 내뿜는 검은 증기 예인선이 그려져 있다. 기술과 산업을 바탕으로 한 근대 문명의 서막을 알린다. 수공업 시대가 저물고, 증기기관이 주도하는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도 첫 부분에 제임스 본드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는 1995년 영국 BBC 방송과 내셔널 갤러리가 공동으로 조사한 '영국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그림' 1위에 선정됐다. 터너 자신도 '나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2020년 2월 영국 20파운드 지폐 도안으로 화가로서는 처음 터너의 초상화와 이 그림이 채택됐다. 지폐 뒷면에는 "빛은 그러므로 색이다"(Light is therefore colour)라는 터너의 명언과 유언장에 쓰인 터너의 서명이 새겨졌다.
터너는 1775년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에 온 손님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미술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골의 풍경에 매료돼 그린 전원 풍경화를 사람들이 찾으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됐으며, 14세때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해 정식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그후 그는 24세때 준회원, 27세때 정회원이 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터너는 특히 수채화를 좋아했다. 수채화 기법은 후에 그의 작품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밑작업이 된다.
초기 터너의 그림들은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전적인 풍경화 모습을 취하고 있다. 1796년 '바다의 어부들'(Fishermen at Sea), 1797년 '달빛, 밀뱅크 연구', 1798년 '돌바단 성'(Dolbadarn Castle) 등이 대표작이다. 터너는 로랭을 뛰어넘는 풍경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67세때 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체험하기 위해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가는 증기선 에어리얼을 탔다. 배가 폭풍우를 만나 요동치자 그는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어가면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겨울 밤바다를 관찰했다. 이는 1842년 '눈보라 -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이라는 작품을 낳게 된다.
바다는 배의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뿌옇다. 흐릿한 붓터치는 감상자의 시선을 끊임없게 움직이게 만든다. 어디가 바다이고 파도이며, 어디가 하늘인지, 증기선은 어디 있는지 뚜렷하지 않다. 파도에 흔들리는 증기선 굴뚝의 갈색 연기, 은색의 창백한 하늘, 비를 잔뜩 머금은 검은 구름, 일렁이는 성난 파도, 소용돌이치는 거센 바람이 회색과 녹색, 갈색의 붓터치로 화면 안에 가득하다. 회색과 갈색과 검정색을 활용한 '소용돌이 구도'는 폭풍과 파도, 휘몰아치는 비바람, 위태로운 배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마치 추상화 같다.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자연 풍경은 이후 인상주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그림은 당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터너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작품", "비누 거품과 석회 반죽뿐인 작품"이라고 혹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유명 미술비평가 존 러스킨은 "여태까지 그려진 바다 그림 가운데 바다의 움직임과 엷게 낀 안개, 빛을 가장 장엄하게 표현했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터너는 "이 그림은 이해받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폭풍을 관찰하기 위해 선원들에게 나를 돛대에 묶게 했고, 그 4시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는 전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상황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고 했다.
터너의 그림 중에는 새로운 기술혁명의 상징물인 증기기차를 타보고 나서 엄청난 기차의 속도에 놀란 감흥을 화폭으로 옮긴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1844) 작품도 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을 세워준다는 조건으로 1만9000여점에 이르는 데생과 수채화, 유화, 스케치를 영국 정부에 기증했다.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기관인 런던 데이트 브리튼은 11개의 월리엄 터너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데이트 브리튼이 매해 가장 주목할만한 미술가에게 수여하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터너 상'(Turner Prize)다. 2014년에는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미스터 터너'가 상영되기도 했다.
터너는 말년에 도시를 떠나 해안에서 가까운 첼시의 외딴집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화가로서는 유일하게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식 등이 열렸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됐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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