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그날의 상처 [이지은의 신간: 나는 범죄 피해자입니다]

이지은 기자 2025. 5. 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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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범죄 피해자입니다」
범죄 피해자 이야기 담아
피해자들의 고통에 집중
치유 과정 4단계로 나눠
트라우마 치료 안내서
이 책은 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과 이를 치료하는 방법을 다룬다.[사진 | 연합뉴스]

지난 3월 영남지역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로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잿더미가 된 집과 일터 앞에서 피해자들은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문제는 피해 복구만큼 그들의 심리적 상처 또한 쉽사리 아물지 않을 거란 점이다.

재난뿐만이 아니다. 각종 참사나 범죄로 인한 희생자나 생존자, 가족 등 피해자들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사람들은 먼저 생각해야 할 '피해자들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보다 사건의 발단이나 가해자의 의도·행동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피해자나 그 가족들이 겪어야 할 트라우마는 그 후의 관심사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3인이 공저한 「나는 범죄 피해자입니다」는 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 증상과 치유 과정을 다룬다. 저자들은 범죄 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인 '스마일센터'의 지역 센터장으로, 피해자들의 정신적 치료를 돕고 있다. 스마일센터는 다양한 방법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치료하고, 심리 상태의 진단·상담은 물론 범죄 사건을 끝맺기 위한 수사 및 법률 지원 등을 제공한다.

책에는 저자들이 센터에서 접한 범죄 피해자들의 사례가 수록돼 있다. 지인의 강도 미수 및 방화를 겪은 보경씨, 어린 시절 친오빠로부터 지속적인 위협과 폭력을 당한 채린씨, 계부의 성폭행을 경찰에 신고한 뒤 센터로 오게 된 지우씨 등 피해자들은 나이와 성별, 트라우마 사건과 사건 이후의 상황이 제각기 다르다.

저자들은 트라우마의 영향을 '화마'의 비유한다. 산 전체를 집어삼킨 불이 단번에 진화되지 않듯 트라우마의 불길 역시 짧은 시일 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PTSD는 지속적 후유증을 남기며 자신의 심신뿐만이 아니라 대인관계에까지 광범위하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PTSD 치유 과정을 4단계로 나눠 제시한다. 1장에서는 범죄 피해라는 트라우마를 대형 화재에 빗대어 사건 직후 일어날 수 있는 반응들을 소개한다. 과각성과 저각성, 불면, 우울 등 급성 반응과 저각성이 심해져 나타나는 '해리(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장은 급성 반응이 잡힌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는 트라우마 재경험, 자기혐오, 불면과 악몽 등 다양한 증상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지속되는 트라우마 영향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신체, 인지, 심리적 변화를 알아본다. 기념일 반응, 깊은 비애, 중독과 자해 등이 해당한다.

4장에서는 외면해 온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 피해자끼리 보듬어주는 것,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것 등 회복과 희망의 의미를 되새긴다. 저자들은 치료 시작을 '최대한 빨리' 하는 게 좋다며, 사건 1개월 내에는 자신의 정신건강에 대한 평가를 받아보길 권한다.

범죄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결코 '남의 일' '특별한 개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선 안 된다. "이 책은 단지 범죄 피해자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범죄 피해자의 주변인, 공통의 트라우마를 겪은 세대, 크든 작든 트라우마 사건을 겪었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저자들은 판단보단 공감으로, 감상보단 그들의 입장을 이입해 트라우마 치유 과정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지은 더스쿠프 기자
suujuu@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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