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아닌 해병이었다… 군마 '레클리스'의 위대한 정신
연천의 고지와 제주의 초원에서 정신을 되살리다
레클리스(로빈 허턴 지음·황하민 옮김 / 도레미 / 326쪽 / 1만 9800원)

1953년 3월 한국전쟁의 마지막 격전장이었던 경기 연천군 장남면 매향리 지역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영웅이 된 군마 '레클리스'. 포탄 1만 4000발이 쏟아지는 격렬한 전투 현장에서 레클리스의 거침없는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당시 중공군은 판문점 북방의 네바다 구역, 즉 베가스, 리노, 카슨 고지를 집중 타격하며 최전선 돌파를 시도했다.
쏟아지는 포탄이 공중에서 폭발할 정도로 치열한 고지 점령전에서 레클리스는 하루 56㎞를 이동하고, 죽음의 고지를 51번 왕복했으며, 88㎏의 탄약통을 지고 총 5t의 탄약을 운반했다. 그 이름처럼 '무모할' 정도의 사선을 넘나드는 투혼으로 미 해병대 전투 작전의 중심이 됐다. 레클리스의 눈부신 활약으로 미 해병대는 베가스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서 태어난 레클리스는 제주마와 서러브레드의 혼혈마로, 본명은 '아침해'였다. 경주마로 조련된 아침해는 군마가 필요했던 미 해병대 피더슨 중위의 눈에 들어 250달러에 팔린다. 미 해병대 제1사단 무반동총 소대에 배치된 레클리스는 전쟁 대비 군마 훈련을 받은 후 놀라운 전쟁 병기로 거듭난다. 통신선을 피해 이동하는 법, 폭격 상황에서 몸을 낮추는 법, 벙커로 대피하는 법 등의 전투 기술을 단 몇 번의 연습으로 익혔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했다.
포화 속을 뚫고 탄약을 운반하는 주요 임무 외에도 부상병을 실어 나르는 등의 역할로 레클리스는 해병대원 사이에서 '말'이 아닌 '해병'으로 불렸다. 레클리스는 뛰어난 전공을 인정받아 미국 해병대 역사상 최초로 동물에게 수여한 하사 계급장을 받고, 미국에 귀화한 이후 상사로 승진한다. 또 미국 퍼플하트 훈장, 유엔 종군 훈장, 미 국방부 종군장 등 10개 이상의 훈장을 받았으며, '라이프' 지가 선정한 미국 100대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의 울림은 동물과 군인이 나눈 특별한 유대감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함께 잠을 자고, 음식을 나누며,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가족처럼 의지하며 극한 상황을 이겨냈다. 레클리스는 단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군마가 아니었다. 해병들은 암말인 레클리스를 '그녀'라 부르며 사람처럼 대했고, 레클리스 역시 병사들의 감정을 읽고 행동했다.
레클리스의 혈통은 어미가 제주마, 아비는 서러브레드로 추정되는 혼혈마로, 오늘날 '한라마'로 불리는 품종이다. 제주마의 강인함과 서러브레드의 날렵함을 고루 지닌 덕분에 레클리스는 전장에서 뛰어난 체력과 끈기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레클리스의 고향인 한국에서 이 비범한 군마의 이야기는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다. 2016년 레클리스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실물 크기의 동상이 세워졌고, 2024년에는 레클리스의 뿌리가 있는 제주에 또 하나의 동상이 세워졌다.
연천 고지와 제주 초원에 세워진 두 동상은 전장을 달리며 탄약을 나르고 동료 병사의 생명을 지켜준 군마의 실화를 증언하고 있다. 레클리스가 보여준 투혼과 헌신, 그리고 인간과 말 사이에 맺어진 전우애는 전장을 넘어 우리가 이어가야 할 고귀한 유산이다. 레클리스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오늘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살아 있는 역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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