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방의 시조새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한겨레 2025. 5. 6. 16:1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어린이글방 낭독회를 했다. ‘글방의 시조새들’이라는 제목으로. 2학년 때 시작해 6학년 때까지 글을 쓴 심화 샤인 로하의 글과 4학년 때 시작해 역시나 6학년 때까지 참여한 양몽 검바의 글을 묶었더니 340쪽에 달하는 책이 되었다. 어린이 시절을 건너 청소년 시기로 넘어가는 사춘기 작가들의 책 출판을 축하할 겸 부모님들과 친구들, 주변의 지인들을 초대해 낭독회를 연 것이다. ‘글방의 시조새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야말로 어린이글방의 시초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일 드레스코드는 ‘남자는 핑크지’ ‘여자는 사월의 연두’. 핑크옷이 없다고 아우성치던 글방의 소년들이었지만 막상 당일에는 다양한 범주의 분홍빛 옷을 입고 나타났다. 어찌나 화사하던지 역시 남자는 분홍이다. 낭독회장 한편에 그동안 쓴 원고지 공책을 전시하니 그 양이 대단했다. 심화가 쓴 공책만도 20권이 넘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필을 꼭 잡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던 아홉 살의 심화가 생각나 뭉클했다.

다섯 명의 작가들이 차례로 자신의 글을 두 편씩 읽는 동안 남녀노소 관객들은 집중해서 들었다. 삼각관계는 피곤해, 난 수학은 수영장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서운해요, 내 인생은 언제나 누가 뭐라 하든 내 것일 테니까, 시끄러운 부상자, 모두 흥미진진한 글이었다. 친구와의 갈등, 수학에 대한 철학적 고찰, 엄마에 대한 이중감정, 졸업을 하는 소회, 새를 구출하는 이야기 등 어린이들이 경험하고 이해하고 관찰하고 재구성한 세계가 그들의 목소리로 재현되었다. 낭독이 끝나고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탐조인의 세계를 보여준 검바에게는 언제부터 새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지, 샤인에게는 엄마와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심화에게는 저토록 철학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어른 관객들의 질문에 중학교 1학년 작가들은 긴장한 채로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본행사가 끝나고는 작가 사인회가 있었다. 관객들은 줄을 서서 사인을 받았고 소년 소녀 작가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공들여 자신들의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을 받은 관객 중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울컥하네요, 처음엔 어린이들 학예회 보는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작가와의 대화 시간부터 뭔가 좀 자세가 달라지더라고요. 작가들도 관객들도 모두 진심이네요. 이런 풍경은 처음 봐요. 그는 ‘진심’이란 말에 손따옴표를 했다. 그날 밤 낭독회에 참여했던 신채윤 작가(‘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의 지은이)도 이런 글을 보내주었다.

어른들은 이따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맡겨둔 것처럼 군다. “너희들 덕분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구나” 하고 말한다거나 “어린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것은 지금 당장의 세상이고 또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현재의 세계를 꾸려나가고 있는데 왜 그들은 자주 이야기장 밖의 존재들이 될까? 그들이 이렇게나 분명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내고 있는데 말이다. 오늘 팟캐스트 ‘쓰는 생활’에서 어떤 동료는 낭독회를 듣고 그들이 미래의 작가들이 아니라 이미 동료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 동료 작가들이 쏟아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그 이야기들이 무너뜨리고 다시 지을 세계가 기대된다.

나 역시 이 어린이들이 장차 커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그들은 작가다. 세계의 구성원은 성인만이 아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역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요한 구성원이다. 어린이들이 커서 이 사회의 주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인 채로 이 사회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매번 상기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요구와 소망과 바람은 미숙한 욕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한 사회의 주요한 의제와 안건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장차 커서 내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상태로 나의 이웃이자 동료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들의 글을 주목해 읽는 이유다.

얼마 전 글방에서 ‘대사건’이란 글감을 내준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난 대사건 세 가지 정도를 써보자는 제안에 4학년 야니는 이런 글을 썼다.

나에게 좋고 나쁜 대사건 2개가 있다. 일단 나쁜 일부터 말하자면 어제 들은 것이다.사건이 생긴 건 작년 12월이다. 군대가 종이관 3000여개를 시켰다(주문했다는 의미)는 말이었다.자기편이 아닌 사람은 죽인다고 관을 샀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엄마가 “우린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라고 했다. 근데 그 많은 사람이 우리 가족이 될 수도 있다. 근데 그 정도면 살인미수죄인데 풀어준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다. 암튼 나쁜 일은 여기까지만 하고 좋은 일을 말해보겠다. 우리 동네에 주지훈이 온 것이다.(이하 생략)

6학년 검바는 이런 글을 썼다.

2024년에는 이같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윤석열의 계엄은 이길 수 없었다. 12월 밤 갑자기 대통령이 계엄령을 내렸다. 지금이 1980년대도 아니고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게 웃기다. 계엄 다음 날 나는 친구들과 왜 갑자기 계엄령을 내렸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주장이 나왔지만 가장 유력한 주장은 윤석열이 자꾸 자기랑 자기 와이프 스캔들이 나오니까 엿 됨을 느끼고 퇴임하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10년 후 5학년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배울 때 2024년에는 어떤 대통령이 시간 감각 없이 있다가 탄핵 당했다고 배울 거고 넷플릭스에서는 ‘서울의 겨울’이 개봉할 것이다. 2024년 마지막을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끝내다니 정말 신기한 한 해다.

어린이들은 계엄을 대사건으로 인식하고 이 과정을 함께 겪으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 대사건은 그들의 생을 관통하며 정의와 저항, 평화와 헌신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갈 것이고 공동체의 이상과 목표를 만들어나가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디지털 언어에 나보다 익숙하고 인공지능을 나보다 잘 활용하는 어린이들은 앞세대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자신들의 미학적 윤리적 표준을 생성해내고 있다. 게으르지 않은 어른들만이 이들과 공통의 미감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