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동학군 최후의 항전 장흥석대들.... 화승총과 소총의 ‘무기’력한 싸움통한의 패배
진압연합군-동학군, 화력 1대 250~500 수준차
농민군 처형 자리에 순절비, 영회당, 불망비
100여년 후 장흥 동학농민기념탑에 추모 발길

#1894년 12월 석대들 전투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화들짝 놀랐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체포된 상황에서 장흥도호부와 강진 전라병영이 불탔다는 소식은 믿기 어려웠다. 더욱이 광주 나주의 동학농민군들이 자진해산했다지 않은가. 왜 장흥에서만 불길이 거세게 타오른다는 말인가.
조선군 우선봉장 이두황 부대는 순천에서, 좌선봉장 이규태 부대는 나주, 영암을 거쳐 장흥으로 내달렸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3개중대도 세갈래로 나눠 장흥을 압박했다. 1대는 영암에서, 2대는 능주에서, 3대는 장흥으로 직행했다. 조일연합 진압군이 장흥을 포위하는 형세였다.
강진 전라병영성을 깨부순 동학군은 1894년 12월 12일(음력) 장흥으로 귀환, 남문 밖과 모정 뒷산에 진을 쳤다. 이날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 선발대도 장흥에 들어왔다. 경군, 일본군, 장흥 수성군, 민보군 등 토벌연합군과 전남서남부 동학군 3만여 명이 장흥에서 대치했다.
양측은 이날 바로 맞붙었다. 일본군과 서울에서 온 통위영 부대(경군)는 30명에 불과했다. 수 천명의 농민군은 경군 선발대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탄이 동학군에게 날아왔다. 일본의 신식무기는 그랬다.
스나이더 소총은 영국에서 개발된 후장식 단발 소총으로 최대 사거리가 1천800m였다. 일본은 본토 시모노세키 수포창에 탄약 10만 발을 요청했다. 여기에 미국제 게틀링 건은 수동식 기관총으로 분당 400발을 발사했다. 동학군의 무장은 화승총에 죽창, 호미, 낫...
"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타 들어 가는 것을 기다려야 하고, 사정거리가 100 여 보인데 반해, 양총(일본군 소총)은 자발식이고, 사정거리가 500보라서 토벌군이 100여보 이상의 거리에서 사격하면 농민군은 그저 바라볼 뿐 응사할 수가 없었다" (토포사 지석영 기록)
일본군과 동학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1 대 250~500 수준이었다. 일본군 1명이 농민군 250명 이상을 상대했다는 얘기다.

농민군은 너른 벌판인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나갔다. 압도적인 병력을 믿고 산기슭에서 개활지로 나왔다. 석대들로 나오니 온 사방에서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총 한방 쏘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붉은 피가 탐진천에 흘러 넘쳤다. 통한의 패배…. 그나마 살아 남은 4~5천명은 17일 관산읍 옥당리에 재집결해 항전을 벌였으나 이 또한 무기력한 싸움이었다.

# 죽어서 역사로 살아난 이소사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승리한 진압군은 여성 동학 지도자를 체포했다. 이소사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토벌군 우선봉장이었던 이두황이 남긴 '우선봉일기'와 일본의 토벌대 대장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구술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 일부 일본 신문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1895년 3월 5일자 일본의 '고쿠민(國民) 신문'에 따르면 그는 23세로 용모가 빼어났다.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는 말 위에서 지휘했다고 한다.
그녀는 체포 후 7~8일 동안 차마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일본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는 조선토벌군 우선봉장 이두황에게 이소사의 나주 압송을 지시했다. 미나미는 이소사를 직접 보았다. 얼마나 고문이 가혹했는지 적장마저 고개를 휘저었다.
"그 전부터 조선의 처벌이 매우 엄중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여자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양쪽 허벅지의 살을 모두 잘라내어, 그 한쪽은 아예 살을 벗겨내어 뼈만 남고 다른 한쪽은 피부와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여자가 압송되어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송장 상태였다.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코를 찌르고….그 참담한 꼴은 무참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동학당 정토 약기)

# 영회당-순절비 대 동학기념탑과 기념관
실패한 동학혁명은 100년 넘게 난(亂) 이었다. 동학교도들은 폭도였고, 이들을 진압하다 숨진 장졸들은 숭고한 전사자였다.


그날 후 100여년이 흘렀다. 1992년 석대들 언덕에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세워졌다. 2004년에는 동학 특별법이 제정됐고, 2015년에는 장흥 동학혁명기념관이 건립됐다. 농민군의 이름들이 다시 되살아 났다. 영회당 무성한 잡풀과 누구 한명 찾지 않는 순절비…. 동학기념관에는 사람이 몰린다. 역사의 정의는 그리한가.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전남 장흥군 장흥읍 읍성로2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