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현상’과 대한민국의 성공 모델의 종언 [아침햇발]

길윤형 기자 2025. 5. 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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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디시(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국가 기도의 날’ 기념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길윤형 | 논설위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2000년대 중후반 어느 무렵까지 세계는 곧 미국이었고, ‘글로벌 스탠더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뜻하는 것이었다. ‘반미’를 외치는 거센 함성 속에도 미국은 꿋꿋이 지금의 자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응석’의 감정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2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한 지 불과 100여일 만에 미국에 대해 우리가 품어왔던 ‘전통적 믿음’이 급격히 해체돼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9·11(2001) 이후 20여년 동안 미국 내에서 소리 없이 진행돼온 ‘격렬한 변화’에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너무 무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류 언론이 생산해낸 세련된 정보가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고등학교 정도를 나온 내 또래의 ‘평범한 미국인’이 정작 어떤 고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한참이나 기억을 쥐어짜내 카투사 시절 ‘전우’였던 와이오밍주 출신의 래디스(Raddice) 이병(앞 이름은 잊었다)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갓 스무살이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생계를 위해 입대를 선택했다. 벌써 한차례 이혼 경력이 있어, 매달 전처에게 아이의 양육비를 보내고 있었다. “복무를 마친 뒤 대학에 가고 싶다”며 “카투사들은 대학생이어서 좋겠다”고 했던 말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벌써 20여년 전 잠시 스쳐간 미국인과 추억을 더듬게 된 것은 지난달 3일 일본 아사히신문 11면에서 읽은 오렌 캐스 ‘미국의 나침반’(American Compass) 설립자의 인터뷰가 안겨준 충격이 꽤 컸기 때문이었다. 신문은 그를 “트럼프 정권의 브레인 중 하나”로 “미국의 젊은 보수를 대표하는 논객”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는 냉전도 (로널드) 레이건(전 대통령)도 역사책을 통해 배웠을 뿐입니다. 우리 세대가 직면한 큰 문제는 냉전이 아니라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경제의 금융화와 금융위기, 빅테크 기업의 대두, 약물 중독, 절망사,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등입니다.”

1983년생인 캐스가 대변하는 미국의 ‘엠제트 세대’에게 냉전을 승리로 이끈 ‘레이건의 미국’은 이미 먼 옛날의 얘기에 불과했다. 그는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게 되며 미국의 산업 기반이 빠른 속도로 약체화해 이제 한계에 달”했고, 그에 따라 “미국 사회 역시 크게 약체화”됐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은 젊은이들을 무의미한 해외의 전쟁터로 내보냈을 뿐이었고, 그사이 한국 등 ‘동맹’은 물론 중국 등 ‘적국’에 자동차·반도체·조선 등 주요 산업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그 대신 미국이 손에 쥐게 된 것은 ‘실업’과 ‘절망’일 뿐이라고, 캐스는 거듭거듭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주장은 일부 수치로 확인된다. 미국 저학력 남성들의 삶이 곤궁해지며, 사회 전체의 자살률이 늘고(2000년 10만명당 10.4명→2022년 14.2명) 남성의 평균수명(2014년 76.5살→2021년 73.5살)은 크게 줄었다.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만 들여다봐선 눈에 띄지 않는 이런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해 트럼프와 캐스가 찾아낸 해법은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택한 정책 수단이 전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고율 관세’였던 셈이다.

캐스는 나아가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사회의 “항구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패권국으로 희생을 감수했던 “옛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국제사회가 납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가 성장하는데도 저소득층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면 사회의 ‘분배 구조’에 큰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미국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를 이뤄낸 것처럼 보인다.

이 병리적 움직임이 정말 미국 사회의 ‘항구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저들의 리더십에 기대 지금의 번영을 이뤄낸 대한민국의 생존 모델 역시 수명을 다했다고 봐야 한다. 관세를 몇 %포인트 깎고 미국에 또 얼마를 투자할지에 대한 기술적 논의를 넘어, 주권자인 우리 자신이 미래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대법원장 조희대가 우릴 위해, 뭔가 그럴듯한 대책을 만들어주진 않을 것 아닌가.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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