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내려가고, 세월호가 올라왔다

한겨레 2025. 5. 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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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333333;">[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51화 </span>4·16 세월호 참사 ⑥ 2016년 말 ‘박근혜 탄핵’ 급물살
‘세월호 1000일’ 맞아 “기억” 약속
촛불진영, 사회개혁 과제 토론회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 담아내려
마침내 박근혜 파면…“승리” 환호
세월호는 탄핵 사유로 인정 안 돼
유가족, 대통령 책임 면죄부에 울분
헌재 선고 뒤 인양 작업 속도 내
참사 1073일 만에 떠오른 세월호
목포신항 들어오던 날 통곡의 바다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그때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는 우상호 의원이었다. 오랜 친구가 원내대표여서 다행이었다. 그는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을 한명 한명 만나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12월3일, 전국에서 232만명이나 모여서 탄핵을 촉구한 촛불집회가 결정적이어서 새누리당 의원들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초조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우상호 원내대표와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라고 채근했다. 그에게 전화를 하면 바쁘다고 끊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를 보내 놨다.

“이번에 탄핵소추안 가결 못 시키면 죽을 줄 알아라.”

거기에 친구들끼리 할 수 있는 육두문자도 좀 들어가 있었다. 그는 그 문자를 지금까지 저장하고 있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 초기에 탄핵은 어렵다고 판단했던 우상호 원내대표는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던 그 상황에서 탄핵밖에 없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2016년 12월9일, 국회에서 234표로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나는 울산에 강연이 있어서 내려가 있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국회 본회의장 방청에 갔던 세월호 가족들이 눈물 흘리면서 기뻐하는 모습, 국회 앞에서 사람들이 얼싸안고 환호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박근혜 탄핵 재판과 ‘세월호 1000일’

한고비를 넘겼지만,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한겨울의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매주 주말마다 열리는 탄핵 집회를 치르느라 비상행동 상황실 활동가들이 고생했다. 나는 공동대표와 적폐청산위원장, 시민참여위원장 같은 직책을 맡아서 매일 회의를 하고, 정당들과 연락하고 만나야 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아예 우리의 연락에 응답하지 않았다. 야당들도 비상행동의 요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긴급과제, 30대 우선과제, 100대 개혁과제를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쳐서 만들어냈다. 비상행동은 박근혜 탄핵 사유 중의 하나인 재벌 개혁을 위한 활동도 이어갔다.

해는 바뀌어 2017년 첫번째 촛불집회는 1월7일 오후 5시30분부터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올라오라-11차 범국민행동’이란 제목으로 열렸다. 이틀 뒤인 1월9일이 ‘세월호 참사 1000일’이었기 때문에 집회 전체를 세월호를 기억하는 내용으로 채웠다. 전명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시민들께 인사를 드렸고, 실종 학생 허다윤양의 아버지 홍환씨가 “팽목항에는 아직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 세월호에서 9명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세월호 1000일을 이틀 앞둔 2017년 1월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올라오라’를 주제로 열린 제11차 촛불집회에서 참사 뒤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선 당시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하자 유가족들이 다가가 안아주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날 집회 중에서 세월호에서 생존한 학생들이 무대에 올랐을 때가 지금도 기억난다. 생존학생들이 무대에 올라설 때부터 엄마들의 눈자위는 붉어졌고, 아빠들은 얼굴을 숙였다. 생존 학생을 대표해서 장애진씨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너희를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 게. 나중에 너희를 만나는 날이 올 때, 우리를 잊지 말고 18살 그 시절 모습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편지를 읽은 생존 학생들을, 304명 세월호 희생자의 얼굴을 새긴 노란색 깃발을 어깨에 두른 유가족들이 올라가 한명씩 안아주었다. 무대에서도 울고, 무대 아래에서도 시민들이 울었다. 그날도 매번 했던 것처럼 저녁 7시에 맞춰서 촛불을 소등했다. 어둠 속에서 9명 실종자의 이름을 부른 뒤에 시민들은 청와대, 삼청동 총리공관,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나누어 행진에 들어갔다.

헌재는 매주 2회씩 집중적으로 심리를 이어가고 있었고, 국정농단 사건의 박영수 특검도 활발하게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1월25일에 최순실(개명 최서원)씨가 검찰에 출석해 정신적 충격 운운하면서 “억울하다”고 기자들 앞에서 항변하자, 그 옆에 있던 청소 노동자 임애순씨는 “염병하네” 하고 되받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상행동은 촛불집회에 그 노동자를 세워서 발언을 듣기도 했다. 최씨에 이어서 2월에는 삼성전자의 이재용 당시 부회장이 구속되었다.

2017년 2월18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시민대토론. 이날 시민들이 가장 힘주어 말한 것은 사회·국민·언론·정의·민주주의 등이었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제공

탄핵 광장에서 촛불권리선언 탄생

2월18일에는 장충체육관을 통째로 빌려서 ‘2017 대한민국, 꽃길을 부탁해’라는 제목으로 시민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는 김제동씨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2201명이 참여해서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다. 그만큼 사회개혁을 바라는 광장의 열망은 뜨거웠다. 이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들은 ‘50인 성안위원회’에서 두차례 심화 토론을 통해서 ‘2017 촛불권리선언’을 완성했다. 나는 그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불의와 억압이 있는 곳에 우리 시민들의 저항이 있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 부도덕한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항쟁, 그리고 87년 시민항쟁을 우리는 기억한다.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거부하며 촛불을 들었던 우리들은 또다시 한겨울의 광장을 지키며 촛불을 들었다”로 시작하는 선언문에서 1700만 시민들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려고 했다.

2017년 3월11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관계자들이 2017 촛불권리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나저제나 헌재의 탄핵 결정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3월10일로 선고일이 잡혔다. 금요일 오전 11시였다. 우리도 헌재 앞으로 결집했지만, 탄핵 반대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모여들었다. 경찰이 양쪽 세력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차벽으로 막아놓은 인사동 길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선고를 들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그렇게 기다려온 한마디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승리했다”며 환호했다. 탄핵 반대 시위대가 있던 경찰 차벽 뒤쪽에서는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곳에서 경찰 차벽을 향해 돌진하던 와중에 4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아쉬움도 있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헌재 결정을 환영하는 간이무대에 올라서 울부짖었다. “왜? 왜? 세월호만 안 되는 겁니까?” 헌재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많은 국민이 사망하였고 그에 대한 (박근혜) 피청구인의 대응 조치에 미흡하고 부적절한 면이 있었다고 하여 곧바로 피청구인이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탄핵 사유로 인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유경근 집행위원장과 세월호 유가족이 울어야 했던 이유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면해주는 이 결정은 이후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근거가 되었다.

전남 진도 동거차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던 세월호가 참사 발생 1073일 만인 2017년 3월23일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마침내 인양된 거대한 무덤, 세월호

헌재 선고 이후 세월호 인양 작업이 속도를 냈다. 실패로 돌아간 인양 방식을 고집하던 해양수산부가 갑자기 공법을 바꿨다. 침몰한 세월호 해저면 바닥을 뚫어서 강철 빔으로 배를 받친 다음에 강철 빔들에 쇠줄을 걸어서 올리는 방식이었다. 직접 배에 쇠줄을 걸어서 끌어올리려다가 선체를 훼손했는데, 방법을 바꾼 것이었다. 그에 따라서 3월23일 세월호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 1073일 만이었다.

3월31일, 새벽 2시께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목포행 버스에 올랐다. 인양된 세월호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새벽 4시나 되었을까? 갑자기 버스 안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박근혜 구속”이란 자막이 버스 티브이 화면에 떴고, 박 전 대통령이 호송버스를 타고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왔다.

버스는 오전 7시께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비도 내리고 바람도 세차게 부는 가운데 천막을 급히 쳤다. 비도 개고, 바람도 잦아들었던 점심 무렵에 예상보다 빨리 세월호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해수부 직원들은 세월호가 들어오는 부두까지 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멀리 희미하게 세월호를 싣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엄마들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부두의 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동안 참았던 모든 울음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각자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열하는 중에 세월호가 다가왔다. 304명의 생명이 죽어간, 거대한 무덤, 세월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들의 통곡 소리가 더욱 커졌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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