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최고 선물이라는 거짓말 [삶과 문화]

2025. 5. 4. 22:0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소파 선생은 쓸데없이 어린이날 같은 걸 만들어놔서."

불린 쌀과 삶은 쑥, 참기름 반 병을 자전거에 싣고 방앗간으로 떠나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엄마는 그렇게 내뱉곤 했다. 그 엄마를 멀거니 바라다보며 나 혼자 혀를 찼었다. 실없이 방정환 선생님을 끌어들이는 엄마가 참 우스꽝스러웠다. 어린이날 선물이랍시고 달랑 쑥 절편이나 들이미는 본인 처지를 부끄러워해야 마땅하건만, 엄마는 뭐가 저리 당당한 걸까. 따지고 보면 절편에 들어가는 쑥도 어린 우리가 학교 갔다 와서 틈틈이 뜯어 모은 거였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얼마나 기다려야 이제 막 아랫마을로 사라진 아버지의 자전거가 김이 솔솔 나는 흰 절편과 쑥 절편을 싣고 돌아올지를 가늠했다. 막 뽑아낸 절편으로 말하자면, 설날 가래떡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호식품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두어 시간마저 엄마는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집 청소, 토끼장 청소, 진달래꽃 따기, 소와 산양 목욕시키기처럼 각자 나이에 맞게 할당된 노역을 우리 형제들은 군말 없이 했다. 그사이 엄마는 밤새 삭혀둔 식혜를 내리고 잡채를 버무려서 상을 차렸다. 손이 야문 언니 둘이 멋을 내 만든 탕수육이나 두릅 튀김, 진달래 꽃전 같은 것도 상에 올랐다. 여기에 뜨끈한 절편까지…. 죄다 집 안팎에 있는 재료들을 그러모아 만든 상이었지만 원탁에 놓인 음식들을 보면 제법 어린이날 잔치 분위기가 났다.

빙 둘러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고 나면 엄마는 우리를 텃밭으로 몰았다. 체험이라는 구실 아래 밭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오늘 같은 날 도시 애들은 동물원에 가고 경양식집에서 햄버그스테이크도 먹는다더만." 낭만을 아는 아버지는 미안한 내색이라도 하셨지만, 엄마는 끝까지 자기합리화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런 날 애들한테 제일 값진 선물은 먹고사는 일의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지." 신경 곤두서게 하는 말들을 참아가며 가지와 상추와 토마토와 수박을 심었다.

사는 게 참… 시간이 많이 지나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우리 형제가 똑같은 짓을 자식 세대에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양 어린이날에 온 가족 불러모아 해쑥으로 절편 만들고 잡채며 봄나물 올려 식사한 뒤 정원과 텃밭 가꾸는 일에 동원하는 것. 따로 찔러준 선물과 용돈 덕인지, 조카들은 나와 달리 이날을 꽤 기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까지 4대가 만나는 오늘, 캐나다에 머무는 조카로부터 메신저가 날아왔다. '고모. 이맘때 시골집에 모여 쑥 캐서 떡 만들고 꽃 따다가 화전 부쳐 먹던 게 그리워요. 언젠가 고모랑 내가 말싸움해가며 정원에 심었던 작약이랑 양귀비꽃도 곧 피겠지요.'

목이 멘 내가 천천히 문자를 읽었고,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당당한 말투로 엄마가 한마디를 보탰다. "그래, 내가 말했잖니? 함께한 추억만큼 값진 선물은 없다고."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