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차 업체들이 ‘정찰제’ 주목하는 까닭
(시사저널=최동훈 시사저널e 기자)
수입차 업계에 최근 신차를 제값에 판매하는 정책을 도입한 업체가 늘어났다.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 수입차 수요 감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관성적인 할인 정책 대신 신차 상품성 개선에 더욱 집중하는 추세다.

제조사가 판매·할인·재고 관리
업계에 따르면 스텔란티스, 혼다, 볼보 등 수입차 업체들은 현재 국내 소비자들에게 차량을 정가 판매하는 정책을 시행하거나 추진 중이다.
각 사 '정찰제'는 딜러사 재량의 프로모션을 배제하고 소비자들이 전국 전시장 어디서나 같은 가격에 신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스텔란티스 코리아는 3월25일 신차 푸조 308 스마트 하이브리드를 시작으로 '안심 가격 보장제'를 다른 모델에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안심 가격 보장제는 영업사원의 비공식 프로모션 혜택을 받아 신차를 공식 판매가 대비 낮은 가격에 구매한 사례가 포착되면 다른 소비자들에게 차액을 보상해 주는 제도다.
스텔란티스 코리아는 공식 딜러사들과 협력해 비공식 프로모션을 일절 배제하고 가격 변동에 대한 고객 불안감을 불식한다는 전략이다. 수입차 업체가 고객에게 직접 보상하는 방식으로 영업사원, 전시장마다 규모가 천차만별인 프로모션 관행을 개선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혼다 코리아는 2022년 이후 3년째 정찰제를 운영 중이다. 소비자들은 혼다 공식 플랫폼을 통해 신차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차량 인도는 딜러사 전시장에서 이뤄진다. 혼다 코리아는 딜러사 재량의 프로모션을 제거한 대신 자체 프로모션을 시행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도 정찰제, 온라인 판매 등을 골자로 한 신차 차세대 유통 시스템 '리테일 오브 더 퓨처(RoF)'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RoF도 타사 정찰제와 마찬가지로 동일 모델, 동일 가격 방침으로 고객에게 일관적이고 투명한 가격 정보를 제공하는 정책이다.
벤츠 코리아는 최근 소매판매 전략 수립, 딜러사 판매 협업, RoF 도입 후 피드백 마련 등 업무를 수행할 전문가를 모집했다. 이 밖에 볼보자동차 코리아, 한국토요타자동차(렉서스·토요타) 등 수입차 업체들이 정찰제를 고수하고 있다.
수입차 업체들이 속속 가격 정찰제를 도입한 배경엔 프로모션 경쟁의 효과가 갈수록 약화한 점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입차 시장을 쌍끌이하는 BMW 코리아, 벤츠 코리아의 지난해 판매대수는 각각 7만3754대, 6만6400대로 전년 대비 4.7%, 13.4% 감소했다. 같은 기간 광고선전비 등 프로모션 비용을 비롯한 지출을 늘리면서 영업이익도 BMW 36.3%, 벤츠 34.2% 줄어들었다.
스텔란티스 코리아는 지난해 프로모션 비용과 신차 재고 수입량을 축소시키는 등 지출을 줄여 영업이익(52억원)을 전년 대비 18.1% 늘렸다. 수입차 수요 감소, 경쟁 격화 등 업황 속에서 프로모션 전략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최근 정찰제를 마련한 수입차 업체들이 할인 혜택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대신 그동안 딜러사 재량에 맡겼던 구매 혜택 정책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딜러사마다 다른 할인 행태를 개선하고 가격 설득력을 높이는 데 사업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각 사는 가격을 비롯한 차량 상품성을 어필해 고객들이 '기꺼이 지불하고 구입하도록' 유인한다는 전략이다. 푸조, 렉서스, 볼보, 토요타 등 브랜드는 신차 가격을 외국 대비 경쟁력 있는 가격에 들여온 점을 고객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해당 업체들은 정찰제 도입과 함께 신차 판매, 재고 관리도 직접 수행할 방침이다. 영업사원에게 프로모션 재량이 주어졌던 기존 딜러사 체제와 함께 정찰제를 운영하면 신차 가격의 경쟁력 저하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수입차 업체들은 정찰제 도입을 계기로 영업사원들이 신차 재고 소진 부담에서 벗어나, 서비스 고도화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방실 스텔란티스 코리아 대표는 지난해 4월 국내 미디어 간담회에 참석해 "일괄적인 가격 정책으로 딜러들이 출혈경쟁을 자제하고 수익을 통해 고객 서비스 향상에 재투자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딜러사 인력 감축 불가피한 점은 딜레마
하지만 업계 일각에선 정찰제 도입 성과를 마냥 낙관할 순 없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기존 업체들이 정찰제를 새롭게 도입, 안착시키려면 오프라인 딜러망을 축소해야 사업 효율을 확보할 수 있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는 딜러사와 갈등을 빚는 등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다.
혼다 코리아도 정찰제 도입 후 딜러사 인력 감축을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혼다 주요 딜러사인 KCC모터스의 임직원 수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인 국민연금 가입자 수는 2019년 12월 106명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 사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거친 2022년 12월 99명으로, 3년간 7명 감원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혼다 코리아가 2023년 1월 정찰제를 도입한 후 지난해 12월에 2년 만에 15명 감소한 84명을 기록했다. 전국 오프라인 판매망을 보유한 벤츠나 스텔란티스의 정찰제 도입 성과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다.
기존 가격 정책에서 탈피해 정찰제를 시도하다 난관에 부닥친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포드는 지난해 유럽 전역에서 딜러사를 거치지 않고 신차를 직접 정가 판매하는 '대행사 모델(agency model)'을 전면 도입하려다 포기했다.
앞서 2023년 네덜란드에서 대행사 모델 사업을 시범운영한 결과, 소비자들이 전시장을 찾아가 차량 실물을 살펴보고 영업사원과 소통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판단해서다. 포드가 대행사 모델 전환 과정에서 딜러사 영업 정보를 컨설팅 회사과 공유하다가 기밀이 유출되는 등 잡음을 일으킨 점도 계획 철회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행사 모델에 대한 경험 부족, 소비자 불편 등 요인들이 포드의 결정에 작용한 모양새다.
유럽 자동차 시장조사업체 오토비스타(AUTOVISTA)의 크리스포트 엥겔스키르헨 박사는 "대행사 모델은 (제조사와 고객 간) 원활한 소통과 고정 가격이 핵심"이라며 "하지만 이는 복잡성, 비용, 위험 부담을 늘리고 대행사로 전락한 딜러사가 시장 지위를 상실해 궁극적으론 제조사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의 정찰제 도입 실패 사례가 국내시장에 시사점을 던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입차 업체들이 제값 받기 정책을 도입해 딜러사 간 판매 경쟁이 잦아들고, 고객 편익이 감소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딜러사 간 자유 경쟁을 통한 구매 혜택 확대, 고객 서비스 개선의 계기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희 자동차 칼럼니스트는 "원프라이스 정책은 전시장을 찾아간 소비자들이 영업사원과 협상해 더 만족할 수 있는 가격에 차량을 구입할 기회를 앗아간다"며 "구매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품을 판 소비자 입장에선 역차별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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