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광주 의재로의 주인공, 의재 허백련 [도로명 속 남도 역사인물]

이건상 기자 2025. 5. 4. 00:0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광주가 예향으로 불리게 된 핵심인물... 남종화의 대가
학동삼거리~학운초교~성촌마을 구간 학교, 미술관 등 운집

광주·전남을 부르는 애칭이 몇 개 있다. '의향', '미향', '예향'이 그것이다. 광주·전남은 늘 시대정신을 앞장서 실천했던 정의로움의 고장이다. 한말 최대 의병항쟁지였고, 일제 강점하에서는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광복 이후에는 4·19혁명과 5·18민주항쟁의 주 무대였다. 촛불혁명의 핵심지이기도 했다. 광주·전남이 정의로움의 고장, '의향'이라 불리는 이유다.

광주·전남은 맛의 고을로도 유명하다. 바다와 갯벌, 간척지와 야산에서 건저 낸 다양한 식재료와 어머님의 손맛은 '미향'이라 불린 남도 맛의 원천이었다.

광주·전남은 맛의 고장 뿐 아닌 예술의 고장으로도 불린다. 옛날 다방이 많았던 시절, 다방에 들른 외지인들은 다방마다 걸려 있는 수준 높은 남종화나 글씨에 늘 놀라곤 했다. 판소리의 고을도, 남종화의 고을도, 시가 문학의 고을도 광주·전남이다. 광주를 '예향'의 고장으로 불리게 한 핵심 인물 중 한 분이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다.

오늘 허백련을 기리는 도로명이 그의 아호 의재를 따 만든 '의재로'다. 의재로는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삼거리를 기점으로 학운동에 있는 홍림교의 학운초등학교를 경유, 성촌 마을 입구를 종점으로 잇는 왕복 2,380m 길이의 2차선 도로다. 도로 위의 주요 건물 및 시설로는 한승사, 아남아파트, 학운동성당, 학운동작은도서관, 홍림교, 오성사, 광주광역시창의융합교육원, 운림중학교, 우제길미술관, 학운초등학교, 성불사, 동곡사 등이 있다.

#무등산의 신선이 된 의재 허백련
의재 허백련의 작품, 추경산수도

인간이 마시는 최고의 음료인 춘설차를 벗하며 살았던, 당대 명사들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던 분이 있었다. '의재로'의 주인공 의재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이었다.

허백련은 1891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8세 때 진도에 유배중이던 무정(茂亭) 정만조의 서당에서 글을 공부했다. 의재란 호도 스승 정만조가 지어준다. 11살 때에 소치 허련이 만든 운림산방에서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 그림의 기초를 익힌다. 의재에게 소치는 집안 할아버지뻘이었다.

1912년, 법률 공부를 위해 일본 도쿄에 들어간 후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맺는다. 1913년 법률 공부를 그만둔 그는 도쿄의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원·명대의 남종화 산수 그림을 접하고 독학 중,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화생이 된다. 본격적으로 남종화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귀국한 후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경산수(秋景山水)'로 동양화부 1등 없는 2등으로 입상하면서 화단에 등장한다. 허백련은 '매일신보'와의 수상소감에서 "물형(物形, 물건의 생김새)보다 정신이 풍부한 그림을 숭상한다"고 밝힌다. 심사위원인 일본인 가와이 교쿠도는 "중국 산수도 아니요 그렇다고 일본 그림도 아니, 순수한 조선 산수라는 점에서 호감이 갔다"고 평하였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허백련은 1938년 광주에 정착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남종화 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연진회(練眞會)의 조직이었다. 연진회는 전통서화의 진작과 후진 양성을 목표로 결성되었는데, 회원으로는 구철우·정상호·최한영 등 서화 애호 인사와 지방 유지들이었다. 그가 연진회를 결성했던 것은 남종화의 부흥 만이 전통적인 회화의 현대적 전승이라고 믿었고, 개인적인 활동이 아닌 단체활동을 통해 확대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명감의 발로였다.

허백련은 단순히 그림에만 몰두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허백련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5만여 평의 차밭을 일구어 '삼애다원'을 일구고, 차밭에서 춘설차를 생산했다.

그는 무등산에 먼저 들어와 있던 오방 최흥종과 의기투합,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피폐된 농업의 발전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은다. 그래서 설립한 학교가 삼애학원이었다. 삼애라는 뜻은 조상을 받드는 하늘과 풍요를 기르는 땅과 우리의 삶은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삼애는 후일 허백련의 좌우명이 되었던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을 사랑하자는 홍익인간 사상으로 정립된다.

가난 때문에 진학을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영농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허백련의 이념을 바탕으로 삼은 삼애학원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차제조법과 원예, 식품가공 등을 가르친다. 광주농업기술학교는 1977년 문을 닫을 때까지 2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는 삼애다원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 짓고 "우리 민족이 차를 마심으로서 정신을 맑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판단하여 실천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며 차 문화 보급에도 앞장선다.

국전 심사위원,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한국 예술계의 큰 인물이 된 그는 1977년 향년 87세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은 광주공원에서 광주 시민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계산청하(1924), 설경(1965), 추경산수(1971) 등이 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7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한다.
춘설헌(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

#예향의 혼인 깃든 명소, 춘설헌

무등산 자락의 춘설헌이 남종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의 창작 공간임은 알고 있지만, 그 이전 그곳이 석아정과 오방정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인 춘설헌은 원래 석아정이었다. '돌 벙어리'라는 뜻의 '석아'는 동경 유학 시절 광주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청년독립단 결성과 2·8독립선언 및 3·1운동을 이끈 후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민족 지도자 최원순(1891~1936)의 호다. 석아정은 그 최원순이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돌 벙어리'가 되겠다고 작심하고 요양 목적으로 지은 조그마한 토굴이었다.

1936년, 석아 최원순은 서거 직전에 광주 최초의 목사이자 민족운동가인 오방 최흥종에게 석아정을 물려준다. 석아정 다음으로 '오방정(五放亭)'이 들어선 이유다. 명예욕, 물질욕, 성욕, 식욕, 종교적 독선 등 '다섯 가지를 놓아 버렸다'는 오방의 이름 또한 재미있다.

오방정의 주인인 목사 최흥종은 원래 광주의 유명한 깡패였다. 깡패 시절 망치로 불렸던 그는 선교사의 나환자를 감싸는 진정한 사랑에 감동받고 기독교에 입문, 목사가 된다. 광주 3·1운동 대표, 광주 YMCA 창립, 광주 나병원 설립도 그의 몫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시국 강연을 위해 광주에 온 김구는 오방정을 찾아 '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 한다'는 뜻의 '和光同塵(화광동진)'이라는 휘호를 써 준다.

의재보다 11년 연상인 최흥종은 무등산에 낙향한 의재 허백련과 의기투합한다. 해방 이후 오방이 증심사 위쪽의 초막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오방정의 주인은 의재가 된다. 그리고 1956년, 의재는 종전의 낡은 집을 허물고 오늘 우리들이 보는 벽돌집을 짓고 이름도 춘설헌으로 바꾼다. 이후 춘설헌은 허백련이 타계하는 1977년까지 전통 남종화의 산실로 광주 예향의 혼이 서린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문화계 인사들의 품격 높은 살롱이 된다.

춘설헌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의재 미술관에 보관중인 석아정, 오방정 현판(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22호)과 2010년 춘설헌 입구에 세워진 오방정 기념비가 있다. 춘설헌의 산 역사가 된 이 현판(94×46센티미터)의 한쪽 면은 '石啞亭 惺堂'이라는 글씨가, 다른 한쪽 면은 '五放亭 毅齋道人'이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고, 글자 오방정 윗부분에는 매화가 그려져 있다.

惺堂(성당)은 당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김돈희의 호로, 석아정이라는 현판은 당대 명필인 김돈희가 쓴 글씨임을 알게 해준다. 오방정 글씨와 매화를 그린 주인공은 오방과 의기투합했던 의재도인 즉 허백련이었다. 현판 하나에 새겨진 석아정과 오방정에 춘설헌의 옛 주인의 역사가 묻어 있는 셈이다.

2010년, 창립 90주년을 맞아 광주 YMCA는 창립자인 오방 최흥종의 흔적이 묻어 있는 이곳 춘설헌 입구에 오방정 기념비를 세운다. 오방정 기념비에는 첫 출발이 된 석아정의 역사도 기록하고 있다.

1956년 오방정을 인수한 후 의재는 방 두 개에 마루가 있는 조그마한 집을 짓고 춘설헌(春雪軒)이라는 편액을 건다. 그 후 의재를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오자, 건너편에 방을 두 개 더 늘린다. 현재 본채는 방 두 개에다 거실, 부엌, 화장실이 딸려 있다. 의재는 이 방에서 내방객들을 맞았고, 밤에는 그 좁디좁은 방에서 손님들과 같이 몸을 붙이고 잤다.

전북 부안 출신으로 고려 공산당 창립 멤버인 지운 김철수와 토착 기독교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 여수에 살던 한량 시인 백민은 단골손님이었다. 우리나라 차계의 어른인 효당 스님도 놀러 오곤 했다. 씨알의 소리 편집인으로 유명한 함석헌도, 젊은 시절 시인 고은도 머리 아픈 일이 생길 때면 며칠 씩 춘설헌을 찾아 쉬어가곤 했다. 춘설헌은 의재의 수제자인 이범재, 구철우, 김옥진 등을 길러 낸 산실이었을 뿐 아니라 그런 문화계 인사들의 감각을 기르는 산 교육장이기도 했다.

춘설헌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국내 인사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1970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춘설헌을 찾은 후 동양의 신선 같은 풍모와 식견을 지닌 의재에게 반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무등산을 찾는다. 소설 유리 반지를 쓴 독일 출신의 여류 작가 루이제 린저도 춘설헌 손님 중 한 분이었다.

춘설헌이 근대 호남 제일의 품격을 갖춘 살롱으로 많은 예인들이 찾았던 것은 의재의 풍모와 식견 때문만은 아니었다. 춘설헌이 명품 살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춘설차도 한몫을 거든다. 증심사 주차장 뒤편의 무등산 자락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차밭이 있었다.

해방 뒤 이 차밭을 인수한 의재는 춘설헌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무등산의 명차인 춘설차를 대접했다. 게오르규도, 루이제 린저도 이 춘설차를 맛본다. 차 이름 춘설로 인해 의재는 거처지 이름도 춘설헌이라 짓는다.
의재 허백련 동상(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삼거리)

명차 이름 춘설은 어디서 따온 이름일까? 남송시대 시인 나대경의 수필집 '학림옥로(鶴林玉露)' 속 약탕시의 싯구에 "한 사발의 춘설이 제호보다 더 낫다"는 구절이 있다. 제호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음료다.

즉 이 구절은 눈 속에서도 푸른 움이 올라오는 잎으로 만든 차(춘설)가 일품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 춘설을 그는 무등산에서 재배한 차의 이름으로 삼았고, 그리고 그가 거처했던 집의 이름으로 삼는다. 의재는 평생을 무등산에서 그림을 그리며 인간이 마시는 최고의 차인 이 춘설차를 벗하며 신선처럼 살다 간 셈이다.

그는 세상을 떴지만, 광주의 큰 어른인 의재를 광주 시민들은 쉬이 보내지 못한다. 증심사로 올라가는 학동 삼거리 입구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학동 삼거리에서 증심사까지는 이미 언급한 그의 호를 딴 의재로다. 그가 광복 직후부터 작품 활동에 매진했고 교육사업을 전개했던 무등산 자락에는 제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지하 지상 2층 규모의 의재 미술관이 세워진다.

2001년 개관한 미술관에는 의재의 각 시기별 대표 작품과 미공개작 60여 점을 비롯, 오방정 현판과 의재 사진, 편지 등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명품 춘설차를 생산해냈던 녹차 밭은 아직도 미술관 뒤편에 손길이 덜 미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농업고등기술학교 실습용 축사였던 건물은 춘설차 보급 장소인 문향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의재가 지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시국을 논했던 관풍대는 지금 다례 실습장이 되어 그 뜻을 잇고 있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