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과 몸짓으로 직조한 현대 서커스 무대

최명진 기자 2025. 5. 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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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 개관 10주년 특별 초청공연 ‘더 펄스’ 리뷰
3·4중 수직 인간탑으로 ‘집단적인 몸’ 구현
곡예와 합창 조화가 이뤄낸 종합예술공연
무게감 있는 퍼포먼스 사이 유쾌한 웃음도
'더 펄스(The Pulse)' 공연 모습 ⓒDarcy Grant


“원, 투, 원투쓰리, 원투쓰리포…”

합창 단원들의 낮은 카운트가 정적을 깨며 무대 전체를 감쌌다. 남녀 곡예사들이 사방에서 등장하며 단원들의 목소리에 맞춘 리듬감 있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서 있는 한 사람의 어깨 위로 또 다른 이가 올라서고, 그 위에 또 한 사람이 발을 디뎌 삼층 구조의 인간탑이 세워졌다. 소리와 몸짓이 하나로 엮이며 무대의 서막이 열렸다.

호주 현대 서커스 단체 ‘그래비티&아더 미스(Gravity & Other Myths)’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무대에 섰다. 지난 2일 오후 7시30분 ACC 예술극장 극장1에서 열린 공연 ‘더 펄스(The Pulse)’는 ACC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 초청 무대로, 광주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예술성 높은 현대 서커스 작품이었다.

‘더 펄스’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표작으로, 2021년 국제서커스어워즈에서 최우수상·제작상·디자인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이밖에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라 스트라다 그라츠 등 유수의 국제 공연예술제에 초청되며 주목 받은 작품이다.

특히 이 서커스 공연은 ‘합창’이라는 요소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여성 합창단이 무대 위 곡예사들을 에워싸듯 함께하며 풍부한 하모니를 더하고, 때로는 무대의 일원이 돼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눈과 귀를 만족시키는 감각적인 구성이 황홀함을 더했다.

18명의 곡예사와 25명의 합창단이 참여한 이번 공연은 대규모 인원이 함께 만들어낸 에너지가 단연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무대를 가득 메우며 압도적인 풍경을 만들기도, 무리를 이루며 역동성과 조화를 드러내기도 했다.

공연 중간중간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찔한 장면들도 이어졌다. 맨 꼭대기에 올라 있던 곡예사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가 하면, 또 다른 꼭대기 곡예사를 밀어내는 듯한 과감한 동작은 객석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위태롭게 쌓인 인간탑 위 균형을 잡고 버티는 모습은 숨소리마저 멈추게 했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뒤에는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려운 곡예가 무사히 성공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특히 네 명의 곡예사가 아랫 사람의 어깨를 발판 삼아 기다란 수직의 탑을 세워 올리는 순간엔 말로 담기 어려운 경이감이 무대를 압도했다.

무게감 있는 퍼포먼스 사이사이에는 유쾌한 웃음도 함께했다. 한 곡예사가 동료의 배 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자, 배를 밟힌 이들이 비명처럼 터뜨린 ‘Mary had a little lamb’ 멜로디는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곡예사들의 몸은 서로에게 든든한 지렛대이자 구명줄이 되며 하나의 ‘집단적인 몸’을 형성했다. 수직으로 솟구치고, 허공에서 낙하하는 극한의 동작이 가능한 것은 동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덕분이었다.

객석 뒤편에서 시작해 무대 중앙까지 길게 설치된 여섯 개의 밧줄은 공간을 새롭게 정의했다. 얽히고 교차하는 밧줄은 마치 꿈속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배경을 만들어냈다.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은 밧줄 사이로 스며들며 그물망처럼 교차된 선들 위로 곡예사들의 움직임을 비췄다. 그 순간 무대 위는 찰나의 광채로 가득 찼다.

오로지 사람의 몸만으로 이토록 다채로운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들의 몸은 거대한 계단이 되기도, 산처럼 우뚝 솟기도 하며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게 했다.

공연 내내 아슬아슬한 줄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이 이어졌지만, 무대 위에선 놀라울 만큼 정제된 구성과 통제된 움직임이 펼쳐졌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곡예사들의 몸짓, 그에 맞춰 실시간으로 호흡을 맞추는 합창단의 하모니가 하나로 어우러졌다. 단순한 서커스를 넘어선, 하나의 완성된 종합예술이었다.

곡예사들 개개인의 뛰어난 신체 능력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들 사이의 깊은 신뢰가 더욱 기억에 남았다. 그 호흡과 몸짓이 쌓아올린 장면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긴 여운을 남겼다.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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