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겐 그 자체로 ‘적’인 [.txt]

한겨레 2025. 5. 3. 10:0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span style="color: rgb(0, 184, 177);">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span>
스위스 망명해 불어로 쓴 헝가리 작가
생존 위해 강제된 언어와 존재 건 싸움
짧고 단순하게…복종 대신 변형의 성취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싸움은 ‘존재하기’였고, 그녀는 ‘문학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썼다’고 말했다. 사진은 헝가리 쾨세그에 있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무덤. 위키미디어 코먼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잘 알려진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를 ‘적어’(敵語)라고 불렀다. 프랑스어에서 이 표현은 보통 ‘외국어’ 또는 ‘적대적인 언어’를 뜻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언어가 곧 장애물이자 위협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적어’는 ‘적의 언어’가 아닌, 그 자체가 ‘적인 언어’라는 해석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망명자에게 생존을 위해 강제된 언어를 익히는 일은 하나의 싸움이니까. 그 싸움의 희생자는 모국어다. 적어를 쓸수록 모국어는 퇴화한다. 언어는 기억과 감각의 통로이기에, 그 경로가 차단되면 생명력을 잃는다. 우리 안에서 하나의 언어가 죽을 때, 그 언어로 사고하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1956년, 헝가리 혁명 직후 러시아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자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남편과 갓난아기를 데리고 국경을 넘는다. 고향에 두고 온 것은 작문 노트와 첫 자작시들. 산과 들판을 지나 오스트리아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이 잃은 것이 단지 종이 몇장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몇주 후, 그녀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 뇌샤텔로 보내지고, 그곳의 시계 공장에서 일하며 프랑스어를 배운다. 스물한살에 어린아이처럼 다시 알파벳을 익힌다. 누군가 그녀의 동유럽 억양을 비웃을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읽고, 쓰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다. 헝가리에서 작가를 꿈꿨던 여자는 하루아침에 스위스의 노동자이자 이민자, 문맹이 되었다. 단지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존재를 둘러싸던 맥락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후에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 그것은 철학적 사유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녀가 적대적인 프랑스어로 고통스럽게 글을 썼던 이유도 바로 그 ‘존재한다는 감각’을 붙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망명자에게 생존만큼 절실한 것은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다.

자전적 에세이 ‘문맹’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시계 공장의 규칙적인 기계 소리에 맞춰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고 고백한다. 무용한 모국어와 냉정한 적어 사이에서, 그녀의 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떠도는 글이었다. 본래 시란 언어를 날개 삼아 의미 너머로, 다른 세계로 비상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날개가 불완전하다면, 시는 정처 없이 공중을 떠다녀야 할 것이다. 부유하는 것은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한다.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다만 거기 있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싸움을 해야 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싸움은 ‘존재하기’였고, 그녀는 ‘문학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썼다’고 말했다.

몇년 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시집 ‘클루’(Clous)의 번역을 제안받았다. 우리말로 옮기면 ‘못’이라는 뜻이다. 작가가 헝가리어로 쓴 시를 프랑스어로 직접 옮긴 작품으로, 프랑스어로 쓴 시도 함께 실려 있다. ‘못’을 처음 읽었을 때,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떠다니는 그녀의 소설과는 달리 그 시는 어딘가에 위태롭게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불완전한 날개를 가진 자에게 한쪽 다리가 생긴 듯했다. 나는 그 다리가 딛고 있는 땅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고, 그래서 그 시를 옮기는 일이 마치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것처럼 흥분되고 또 두려웠다.

얼마 전, 그 시를 다시 펼쳤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번역 파일을 열어보며, 단어의 오역이 아닌 해석의 오류를 발견했다. 나는 그 시를 여행하듯 옮겼던 것이다. 동경과 호감에서 출발한 낯선 세계를 향한 여행. 하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 그것은 절대 여행이 아니었다. 강제된 언어, 생존을 위한 언어로 시를 옮기는 일은 또 하나의 망명이었을 것이다. 망명이란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망명자는 언제나 망명 중이고, 그녀가 옮겨온 시는 이 상시적인 망명을 증언해야 한다.

표제작 ‘클루’(못)에서 못은 문을 닫고, 창문에 창살을 박으며, 세월과 죽음을 짓는다. 존재를 닫고 고립시키고, 시간을 겹겹이 쌓아 죽음이 되는 것.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세계에서 모든 기억과 진실이 표류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못’을 소재로 썼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부유하던 존재가 고통과 시간을 못으로 박아 마침내 죽음이라는 정박지에 서게 된 게 아닐까. 끊어진 것을 다시 연결하는 건 못이고, 아마도 그 못은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그의 몸과 마음에 고통스럽게 박은 언어였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싸움은 고집스러웠다. 그녀는 한번도 그 적대적 언어에 복종하지 않았다.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정복한 것도 아니었다. 끝까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방식은 ‘전용’이었다. 적대적인 언어를 자신의 생존 도구로 변형한 것. 그녀가 전용한 언어는 균열과 파편의 흔적을 간직한다. 짧고 끊어지는 문장, 부연 없는 묘사, 복잡한 감정 표현의 생략, 좁은 어휘, 단순한 구조. 그 파편적 언어 세계에서 독자는 그녀처럼 맨몸으로 살아남는 인물들과 왜곡된 기억, 쉽게 부서지는 진실과 함께 고립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불완전함과 한계를 질료로 자신만의 세계를 세운다. 문학의 국경을 넘어, 망명자는 마침내 창조자가 된다. 바로 그곳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진짜 조국이다. 그 안에서 그녀의 언어는 존재의 고통을 아는 이들에게 영원한 동맹의 언어로 남는다.

신유진 작가·번역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